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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회 2001년『문학사상』신인상 당선

2001.11.27 16:19

윤성택 조회 수:5746 추천:109

■ 제49회 『문학사상』신인발굴 발표



  신인작가들의 등용문《문학사상》 신인상 제49회 하반기 공모는 창사 이래 최대 응모량을 보였다. 시 3,224편(280명), 중·단편소설 282편(249명), 장편소설 83편(78명) 등이 응모되어 심사위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문예창작과 및 국문과 대학생들의 응모가 두드러졌고 양적인 증가만큼이나 작품의 수준이 상향 평준화 현상을 보여 심사위원들은 향후 한국문단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고무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불꽃 튀는 경합 끝에 시 부문 2명, 중·단편소설 부문 1명, 장편소설 부문 2명, 장편동화 부문 1명 등 6명의 당선자가 결정되었다. 당선자들에게는 축하를 보내며, 아쉽게 낙선한 분들에게는 정진을 당부드린다. 아울러 수상자를 내지 못한 평론과 시조 부문도 끊임없는 관심을 기대한다.

언어의 탄력과 뛰어난 상상력
 심사위원 김승희(시인·서강대교수)/ 이승하(시인·중앙대교수)

심사위원을 감탄케 한 3천여 편의 응모작품
  투고자는 모두 280명, 각자 열 편 안팎의 시를 투고했으므로 한꺼번에 읽어야 하는 작품의 수는, 심사위원 두 사람이 나누어봐도 1천5백 여 편에 이르렀다. 요즘에는 시 창작 기법을 가르치는 곳이 대학 문예창작학과가 아니더라도 엄청나게 많은데, 그래서인지 영 형편없는 작품보다는 누군가의 지도를 받은 흔적이 역력한 작품이 훨씬 많았다. 시집이 도무지 팔리지 않는 이 시대에 시 쓰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쉬운 점은 전반적인 수준이 높아졌지만 눈에 확 띄는 작품이 없었다는 것이다. 팽팽한 긴장감과 섬뜩한 현실감이 시의 행간에 넘치는 것이 아니라, 세련된 표현으로 가장한 흉내내기와 현란한 수사에 기댄 허위의식이 도처에서 눈에 띄어 눈살이 찌푸려졌다.
  대다수 투고자들이 '왜 내가, 시가 읽히지 않는다는 이 시대에 꼭 시를 써야만 하는가' 하는 절실한 자문의 과정이 없이 시를 쓰고 있다. 신인에게 요구되는 뚜렷한 개성이 없는 대신 태반이 그만그만한 수준의 작품이라 실망감이 더 컸다. 시가 고뇌의 산물이 아니라 지적 조작의 결과물이었다면 진작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또 한 가지의 문제점은 체험을 동반한 감동적인 시나 참신한 상상력에 기반한 시가 보이지 않는 대신 말재간이 넘치는 시가 많았다는 점이다. 즉, 산뜻한 표현들은 많았지만 주제의식은 하나같이 가볍기만 했다. 외양은 행과 연이 나뉘어져 있어 시 같았지만 읽어보니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은 산문시도 많았다. 좋은 산문시는 내재적인 운율을 지니고 있는 법이며, 문장이 길게 늘어져 있지는 않다. 시가 지루하면 참 곤란하지 않은가.
  다행스러운 것은 두 심사위원이 당선작을 뽑는 데 이견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수배전단을 보고><꽃이 피다><사월 초파일, 전봇대> 등을 낸 윤성택 씨는 시의 '재미'를 알고 있는 듯 하다. <수배전단을 보고>의 화자는 귀갓길에 "잘못 든 생生의 내력이 적혀 있는" 현상수배 벽보를 본다. 거기서 출발하여 자아를 새롭게 인식하는 고정이 군더더기 없이, 흥미롭게 그려진다. 언어의 집중력과 튀는 상상력이 남다른 신인을 만나게 되어 반갑기만 하다.

눈부신 활달한 속도감과 시를 조율하는 솜씨
  "몇 알의 감기약 삼키자 빗물이 휘청휘청 진눈깨비로 주저앉는다"는 산뜻한 표현이 보이는 <꽃이피다>와 "나도 한번쯤은 별빛을 따라/ 스스로 빛을 내며 걸어가고 싶었다/ 그 꿈이 어디로 전송되어진 것일까"는 뛰어난 상상력이 보이는 <사월 초파일, 전봇대>는 윤성택 씨의 밝은 앞날을 예감케 한다. 재치가 승해서인지 시가 전반적으로 가벼우므로 재기 발랄한 언어구사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심도 있는 시를 써보기를 권한다……(중략)……시의 묘미는 서술이 아니라 묘사요, 설명이 아니라 압축에 있다. 당선된 두 명은 본격적인 습작기가 이제부터 시작된다는 각오로 시를 쓰기를 바라며, 최종심에 올랐다 낙선된 열두 분은 심사위원의 형편없는 안목에 분노를 금치 못하는 심정으로 더욱 치열하게 작품을 쓰기를 바란다. 운 좋게 당선되었다 사라져버린 선배들의 전철을 밟느니 이 시점에서 붓을 꺾는 것이 자신과 가족에게 이로운 일이니.

■ 당선작

수배전단 외 2편

귀갓길에 현상수배 벽보를 보았다
얼마나 많은 곳에 그의 자유를 알려야 하는지
붉은 글씨로 잘못 든 生의 내력이 적혀 있다
어쩌다 저리 유명해진 삶을
지켜 봐달라는 것일까
어떤 부릅뜬 눈은
생경한 이곳의 나를 노려보기도 한다
  
어쩌면 나도
이름 석자로 수배중이다
납부 마감일로 독촉되는 고지서로
열자리 숫자로 배포된 전화번호로
포위망을 좁혀오는지도 모른다

칸 속의 얼굴은 하나 둘 붉은 동그라미로
검거되어 가는데, 나를 수배한 것들은
어디서 잠복중일까

무덤으로 연행되는 남은 날들,
그 어딘가
잡히지 않는 희망을
일망타진할 때까지
나는 매일 은신처로 귀가하는 것이다.



꽃이 피다          

  1.
  공사장 모퉁이 플라타너스가 표지판으로 아랫몸을 가리고 서 있다 인부는 어디로 갔는지 퍼런 철근들이 저희끼리 묶여 있다 간간이 잡초들만 바람을 불러 모아 수근거릴 뿐, 계절을 문신한 잎새 하나 후미진 골목에서 뛰어오다 멈춰 선다 늙은 전신주가 제 힘줄로 끌어 모은 낮은 집들 너머, 잠시 정전이 되는 하늘에는 길을 서두르는 먹구름이 송신탑에 걸려 있다

  2.
  전기스토브가 덜 마른 속옷에게 낯빛을 붉힌다 형광등이 한낮을 키우며 시들지 않는 것들을 읽어낸다 두통에 시달리다보면 꽉 잠가지지 않는 수돗물이 웅크려 떨어지고, 거리를 배회하던 빗소리 굵어진다 몇 알의 감기약 삼키자 빗물이 휘청휘청 진눈깨비로 주저앉는다 미술학원 창가, 젖은 스케치북 밑그림 밖으로 봄꽃들이 번져 나온다

스위치를 내리면 발끝까지 환하게 불이 들어올 것만 같아, 유폐된 이 공간, 숲으로 가득 차 나뭇잎마다 뚝뚝 빛을 튕겨낼 것만 같아, 온몸에 열꽃 만발한 밤, 창가 성에를 지우며 산수유나무 붉은 알전구 반짝이고  



사월 초파일 전봇대

한때 나는 건너왔다가 건너가는
이별의 것들만 가슴에 세웠다
그 떨림, 차들이 지나칠 때마다
땅 깊은 곳으로 뿌리내렸다
내 둥근 여백의 벽보 숫자들
나로 인해 기억되는 일이 있다면
편지함 같은 변압기로
골목마다 환한 사연을 전해주고 싶었다
언젠가 푸른 신호가 들 때까지
청년의 한쪽 어깨를 받아주다가
같이 길을 가고 싶어
웅웅 소리내었던 것인데
왜 청년은 고개 숙여 흐느꼈던 것일까
그때 나도 한번쯤은 별빛을 따라
스스로 빛을 내며 걸어가고 싶었다
그 꿈이 어디로 전송되어진 것인지
밑줄 같은 전선줄에 괄호처럼 새들이 앉았을 때
어제는 누군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등을 매다는 것이었다
그 저녁부터였다, 그때부터 나도,
등불이 되고 연등이 되어
내 안 뜨거운 전류를 타고
온 마을을  
걸어갔던 것이었다



윤성택

2001년 "문학사상"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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