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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트머스 - 이정희 (회원)

2006.11.17 14:39

윤성택 조회 수:3842 추천:89

* 윤성택 시집『리트머스』(2006년 가을, 문학동네) / 이정희(회원)



        리트머스

        늦은 밤 공중전화부스에 사내가 들어 있다
        꾹꾹 눌러낸 다이얼은 서른 번을 넘긴다
        타국으로 젖어드는 신호음 저편
        그리움이라는 색깔로 반응하는 목소리,
        부스 안은 리트머스 시험지 같다
        수화기는 왼쪽 어깨로 넘겨져 데워지고
        불러낸 이름을 유리창에 적어본다
        글씨도 뿌리를 내리는지 흘러내리는 획마다
        생장점이 먼지로 뭉친다
        바지에 묻은 톱밥은 발아중이고
        뒷주머니에 삐죽 붉은 목장갑도 피었다
        안개에 젖고 밤바람에 흔들려 후둑,
        스포이드 물방울처럼 떨어지는 나뭇잎
        가을은 그렇게 한 가지 색으로 반응해 물들어간다
        사내는 하늘을 봉숭아꽃처럼 물들이고 싶다
        꽁꽁 묶어 보낸 소포를 풀 즈음이면
        첫눈이 내릴 것이다
        슈퍼 간판불도 꺼져버린 자정 무렵,
        사내의 머리와 어깨 실루엣이
        공중전화부스 불빛에 흠뻑 젖는다
        아득히 먼 곳에서도 색이 뚜렷하다


[감상]
우리 때와는 달리 이제는 초등학교 5학년이면 과학시간에 용액의 성질을 배우면서 산성과 염기성을 분류하기 위해 페놀프탈레인 용액과 리트머스 종이를 사용한다. 스포이드로 용액을 빨아들여 리트머스 종이 위에 떨어뜨리면 산성은 푸른 리트머스를 붉게, 염기성은 붉은 리트머스를 푸르게 변화시킨다.

시인은 타국에서 많이 고단했을 노동자의 삶을 <바지에 묻은 톱밥>과 <뒷주머니에 삐죽 붉은 목장갑>이 핀 것으로 이야기해 주고 있다. 육체적인 고단함도 고단함이지만 고향에 대한 향수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또 어찌하겠는가, <불러낸 이름들을 유리창에 적어보고>, <봉숭아꽃처럼 물들이고 싶>은 마음을 <꽁꽁 묶어> 부칠 수밖에. 다행히도 그 즈음 첫눈이 내려 간절했던 소망들을 이루어 줄 것이다. 그가 선 곳이 어두우면 어두운 만큼 <공중전화 불빛>은 그의 색을 더욱 뚜렷하게 보여줄 것이다.

리트머스와 가을, 타국에서 온 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한데 묶어낸 시인의 솜씨가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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