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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사실주의의 감각적 표현 - 후회의 방식>/ 강인한 시인/ 《현대시》2007년 1월호


후회의 방식 / 윤성택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분명하다
달리는 기차에 뛰어든
시간은 더 이상 가지 않는다
으깨어진 핏덩이와 뼈가 허공에 박혀 정지된,
플랫폼을 유령처럼 돌아본다
돌아가고 싶다, 목구멍에서
터널 같은 빛이 터져나온다
뢴트겐 차창을 달고 기차는
역에서 거꾸로 멀어져간다
기적 소리를 비벼끈 꽁초가
손가락 사이 불빛으로 켜질 때
살아 눈뜬 것이 죽음보다 외롭다
한밤중 삼킨 수면제가 한 움큼
손바닥에 뱉어지고 물과 파편이 솟구쳐
책상 위 유리컵으로 뭉쳐진다
어깨를 입은 외투는 캄캄한 밤길을 지나
저녁 어스름까지 데려다 준다
수면제를 건네받은 약사가 수상한
처방을 뒷걸음으로 떼어온다 영안실
흰 천에 덮인 당신이 거실로 옮겨지고
비닐에서 피 묻은 칼을 꺼낸 감식반은
출입금지 테이프를 마저 철거한다
삐끗한 발목으로 창을 넘는
손이 떨린다 당신의 가슴에서 칼을 뽑자
턱에 맺힌 눈물이 뺨을 타올라 눈에 스민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창백한 얼굴,
당신에게 어떻게 용서될 수 있나
기차의 굉음이 레일에서 급히 멈춰 섰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다가온다
나는 마지막으로 공중에서
허공을 찢는 호각 소리를 듣는다



시간의 본체는 기억의 퇴적층이다.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간이 분명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현재의 시간이 과거가 되었을 때라야 한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윤성택의 이 시는 영화와 많이 닮았다.
「박하사탕」이라는 영화가 있다. 소설가이기도 한 이창동이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감독을 맡은 영화다. 2000년에 개봉된 이 영화는 현재라는 시간성이 과거의 집적이라는 전제하에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보여준다. 기차 철길에 한 사내가 서 있다. 그는 두 팔을 벌려 다가오는 기차 앞에 정면으로 마주서서 외친다. "나, 다시 돌아갈래!" 그의 절규는 저 유명한 뭉크의 「절규」처럼 끔찍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달려오는 기차의 굉음에 파묻혀 버린다.
… 현재의 그는 이혼을 당하고 동업자에게 배신당한 자살 직전의 실패한 중년이다. 그러나 죽음 직전 옛 연인의 부름은 그를 박하사탕이나 사진기 등 과거의 응집물들을 통해 과거로 보내진다. 과거의 매 단락은 거꾸로 가는 철로를 통해 열린다. 1999년에서 1979년까지 20년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영호의 삶은 실패한 중년을 넘어 고문 형사가 되고, 오발로 한 여자를 죽인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압군이 되었다가, 순임과 사랑을 시작하는 수줍은 가리봉동 청년으로 변모하는 과정이다. (…) 이 영화는 이상과 순수함으로 무장하고 좋은 인간이 되려 한 젊은 시절의 당신은 지금 어떤 모습인가, 라고 묻는다. 끔찍하지만 도망갈 수 없는 이 질문을 하면서 관객도 어느새 영호와 함께 기찻길을 밀고 들어가 자신만의 과거, 우리 모두의 과거를 현재 속에 반추하게 된다. (유지나, 1999. 12. 23. 세계일보 [영화평] 박하사탕)
윤성택은 이 영화에서 특히 시간의 진행, 그 역순에 주목했던 것 같다. 하드보일드 문체로 쓰여진 이 시는 두 사람의 죽음을 다룬다. '나'와 '당신'의 죽음. 시간적 순서로 보아 '당신'의 죽음이 먼저고 '나'의 자살이 나중에 일어난다.
저녁 어스름 외투를 입고 출발한 나는 캄캄한 밤이 되어 당신의 집에 도착한다. 창을 넘다가 발목이 삐끗한다. 창을 넘어 거실로 들어간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창백한 당신의 가슴에 나는 칼을 꽂는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에 맺힌다. 당신에게 나는 어떻게 용서될 수 있나. 사건이 일어난 집에 경찰이 들이닥친다. 출입금지 테이프를 두르고 거실에서 살해된 당신의 가슴에서 칼을 뽑는다. 흰 천에 덮여 당신은 영안실에 안치된다. 당신이 없는 나의 외로움은 살아 눈뜬 것이 죽음보다 외롭다. 약국에서 한 움큼 수면제를 사오고 한밤중 수면제를 삼킨다. 물 담긴 유리컵이 책상 위에 떨어져 깨진다. 당신에게 나는 어떻게 용서될 수 있나. 나는 철길을 걷는다. 역에서 출발한 기차는 뢴트겐 필름 같은 창을 달고 달려온다. 터널을 지나 드디어 내 앞으로 달려온다. 기적 소리를 듣고 나는 꽁초를 비벼끈다. 나는 외친다. "돌아가고 싶다!" 급히 레일에서 멈춰 서는 기차의 굉음. 한 순간 으깨어진 핏덩이와 뼈가 허공에 흩어진다. 허공을 찢는 호각 소리가 들린다. 이 시의 화자 '나'라는 인물이 남자인 것이 분명한데 '당신'은 성별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사랑하는 여자일 수도 있겠고, 믿었던 친구일 수도 있다. 살인의 동기는 사건의 이면에 잠복해 있는데 아무튼 사건 이후 화자인 '나'는 '살아 눈뜬 것이 죽음보다 외롭다', 죽은 '당신에게 어떻게 용서될 수 있나' 라고 몹시 후회하며 괴로워하고 끝내는 자살을 택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시의 표현 기법이다. 하나의 스토리를 가지고 있는 사건을 마치 필름을 거꾸로 돌려보는 것처럼 시인은 지극히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한밤중 삼킨 수면제가 한 움큼/ 손바닥에 뱉어지고 물과 파편이 솟구쳐/ 책상 위 유리컵으로 뭉쳐진다", 혹은 "턱에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타올라 눈에 스민다" 같은 데서 치밀한 시간의 역순을 보게 된다. 한밤중에 한 움큼의 수면제를 손바닥에 움켜쥐고 유리컵을 들어 약을 삼킨다, 그리고 유리컵이 책상 위에 떨어진다, 물과 유리의 파편이 튀어오른다. 그리고,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턱에 맺힌다, 라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이 시에서 왜 '내'가 '당신'을 살해한 것인지를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당신의 죽음 이후에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혀 불면의 밤을 지새우다가 결국 철길에서 기차를 마주함으로써 '후회의 방식'을 결정한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 시는 한 편의 비극적인 느와르 영화가 주는 슬프고 아름다운 감동과, 극사실주의의 감각적 표현으로 독자를 사로잡는 매력 있는 작품이다.


■ 강인한 시인
1944년 전북 정읍 출생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제5회 전남문학상 수상
시집 『이상기후』,『불꽃』,『전라도 시인』,『우리나라 날씨』,『칼레의 시민들』,『황홀한 물살』, 시선집 『어린 신에게』, 시비평집 『시를 찾는 그대에게』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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