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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속의 시읽기 - 정겸 시인 《시사사》

2007.01.15 10:56

관리자 조회 수:5306 추천:100

<시집 속의 시읽기> / 정겸 시인/ 《시를사랑하는사람들》2007년 1-2월호


대학병원 지하주차장 / 윤성택

빽빽하게 들어찬 어둠을 솎아내느라
형광등 불빛은 가늘게 떨고 있다
그 경계를 잘라내는 환풍기는
울음이 엉겨 잘 돌아가지 않는다
영원히 잠들어 있을지도 모를
이 곳을 깨우기 위해 사이렌은
입구에서 검은 침묵을 매만진다
누구나 지상과 멀어지고 싶지 않듯
지하로 차를 몰고 내려온 이는
잘못 든 길처럼 숙명적이다
그가 홀연 빠져나와 차문을 닫을 때
지하층 전체에 일순 울리는 소리,
누군가 들뜬 페인트처럼 후들거리며
벽면에 기댄다 어쩌면 통곡은
지루한 절차일지 모른다 모든 길에는
끝이 있다고 우회와 우회를 거듭하며
나선 방향으로 낙하한 하역의 공간,
지하로 내려갈수록 묵직한 나사가
조여 오고 있다 그가 못질하듯
구두소리로 걸어 나간다 깊은 밤처럼
고요한 지하주차장, 길이와 폭으로
테두리를 두르던 주차선이 문득
영정 사진에 가 있다 또 누군가
차를 타고 지상으로 올라갈 것이다



대학병원이란 대개가 3차 진료 기관으로 지정되어 있어 중환자들이 가게 되는 마지막 진료기관이 되는 곳이다. 따라서 환자의 삶에 대하여 부활이라는 기대감과 희망을 심어주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환자가 살기 위해 힘을 다해 검어져 온 생명의 줄을 놓아야 하는 인간으로서 마지막 안식처가 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에 반하여 지하주차장이라는 느낌은 왠지 음산하며 기분이 가라앉고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끼는 곳이다. 밀폐된 공간에서 미라처럼 잠을 자던 먼지와 콘크리트 냄새가 일제히 깨어나 코끝을 자극하는 순간부터 지하주차장을 이용하는 방문객의 기분은 위축되기 시작한다. 시인은 대학병원과 지하주차장이라는 복합어를 통하여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이끌어 냈다. 그리고 ‘어둠’과 ‘형광등 불빛’을 통하여 독자로 하여금 긴장감과 이완감을 적당히 유도함으로써 시의 생명인 고무줄 효과를 얻어내는데 충분히 성공한 작풍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나타난 대학 병원의 고객은 환자도 아니고, 위문자도 아니고 바로 조문객이라 할 수 있다. 낡은 환풍기에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기계음, 또한 가라앉는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한 주차장 출입구의 사이렌 소리, 미로 같은 나선형 지하통로를 따라 조문객 자신도 죽음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 시의 절정은 아마도 조문객이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승용차문을 빠져나와 영정사진이 놓여 있는 영안실까지 걸어가는 하나의 과정에서 그려 볼 수 있다. 삶의 상징인 지상과 멀어지고 싶지 않는 인간의 속성과 죽음의 상징인 지하로 내려가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을 시인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세심하고 리얼하게 스케치 하였으며 시의 상징적 의미를 ‘차 문을 닫을 때 나는 울림의 소리’, ‘구두소리’등의 청각적 이미지와 ‘주차선’과 ‘영정사진’ 등  시각적 이미지로 풀어냈다.
또한, 시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시인이 포착한 대학병원 지하주차장에서 느낀 풍경들을 정확한 묘사로 상징화함으로써 독자들은 삶의 한 사이클에 대한 시간적 공감적 느낌을 다시 한번 상상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으며 이 시에 내포 된 시적 감성은 독자로 하여금 또 한번의 전율을 느끼게 하고 있다. (정겸)


■ 정겸 시인
1957년 경기 화성출생  
경희대대학원(사회복지학과)졸  
2000년 세기문학, 2003년 [시를사랑하는사람들]으로 등단  
2004년 공무원문예대전 시 부문 행정자치부 장관상 수상  
현, 경기도청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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