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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오늘의 좋은시《푸른사상》

2009.03.04 23:22

관리자 조회 수:4327 추천:6

  
『2009 오늘의 좋은시』中 / 《푸른사상》(2009)


  데자뷰

  윤성택

  나에게 스미면서 쇄도하는 새벽
  빛은 운명을 가볍게 액세스하며 전원 속
  비밀의 순간들을 인증한다
  진실은 소멸의 속도로 이동해야 한다

  모니터의 검은 점을 통과해 쏟아지는 이메일의 활자들, 점멸하는 입자의 배열이 공중으로 흩날린다 문을 열면 아주 먼 곳일지라도 다른 쪽 문이 열린다 우리의 시간은 종종 다른 곳에 있다

  마음은 생각이 광속도로 지나가는 경치이다

  나를 데리고 가요 그리고 벌판에 세워두는 거죠 돌 더미 위 색색의 깃발처럼 흩날리는 아침을 기다리는 거예요 깊은 숨을 쉬며 당신과 나는 어떤 깜박임으로 알아볼까요 나의 낮은 당신의 밤이 되어 촤르르 지나고 있어요

  무거운 잠수종을 뒤집어쓴 바닥의 수심은 깊다 지상에서 내려온 고무호스로 피가 흐르는 소리, 푸른 기포가 열렸다 닫히면 수면으로 떠오르는 물방울이 씨앗처럼 발아한다 눈동자의 실핏줄이 압력에 불거지며 뿌리로 옮아가는 동안 세계는 점점 사라지는 것일까

  눈물이 밀려드는 예감에는 방향이 있다
  마지막 지점을 관통하는 실루엣
  주위는 나를 읽어들인다 직진하는 빛처럼
  기억이 막을 뚫고 소리를 끌어모은다
  휘감기는 허공에서 차츰차츰 이뤄지는 형체,
  나는 이제 그곳에 있다


        
[선정평]
데자뷰란 최초의 경험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본 적이 있거나 경험한 적이 있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나 환상이다. ‘경험’이라는 시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시의 주제는 ‘경험’이 아닐까. 우리는 대다수 아침에 일어나면 컴퓨터를 켜 간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확인한다. 기계에 전원을 넣으면 지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일들과 갖가지 정보들도 알 수 있고 벗들의 안부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의 시간은 컴퓨터와 함께 하며, 우리의 경험은 컴퓨터에서 비롯되며, 우리의 생각은 컴퓨터에서 출발한다. 어디선가 이 경치를 본 적이 있는데, 언젠가 이 일을 겪은 적이 있는데…….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컴퓨터가 우리가 한 모든 행위를 기억한다는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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