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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숙박계

 

가방을 비우자 여행이 투명해졌다

기약하지 않지만 이별에는 소읍이 있다

 

퇴색하고 칠이 벗겨진 간판은 한때

누군가의 빛나는 계절이었으므로 내일은

오늘 밖에 없다 친구여 너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아직도 여인숙에서 기침을

쏟고 싸늘히 죽어가는 꿈을 꾸기 때문이네

 

수첩이 필체를 혹독히 가둘 때

말의 오지에서 조용히 순교하는 글자들,

나는 망루에 올라 심장의 박동으로 타오르는

소각장을 본다네

 

신발을 돌려 놓으면 퇴실이요

이곳 숫자는 주홍 글씨라네

 

이불을 쥐는 손으로 만지는

전구가 아무도 알지 못하는 호실을 밝힌다

 

아름답다, 라고 슬프게 발음해보는 날들이

좀체 돌아오지 않아도, 빈 집은 제 스스로

별을 투숙시키고 싶다

 

적막은 밤의 숙박계,

치열이 고른 지퍼에 밤기차가 지나면

어느 역에서 가방이 나를 두고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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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노스텔지어

 

무의식은 언어로 구조화 되어 있다는, 잘 알려진 말을 빌리지 않아도 언어는 인간의 처음과 마지막, 삶의 가장 깊고 은밀한 곳까지 파고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때의 언어는 인간과 따로 놓이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한 몸, 한 마음으로 동일한 존재 그 자체인 것이다. 언어와 인간이 따로 분리되지 않으면서 가닿는 경계는 극한상황이다. 태초의 언어가 그러하듯, 존재와 언어가 동일하여 틈이 전혀 개입할 수 없을 때의 언어는 단순히 기표나 기의로 나눌 수 있는 분석 대상이 아니다. 언어에 살과 피가 흐르며 “심장의 박동으로 타오르는” 생명이 살아 넘치는 경지에 도달한 상황인 것이다.

「밤의 숙박계」에서의 말과 글자들은 그러한 지점에 놓여 있다. 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를 마감하려는 자리에서 언어를 불러들인다. 무덤에 자신이 사랑하던 사람들이나 물건들을 함께 매장하던 풍습처럼 시의 주체인 나도 그런 심정으로 언어를 불러들인다. “수첩이 필체를 혹독히 가둘 때/ 말의 오지에서 조용히 순교하는 글자들”처럼 숙박계에 함께 가두어지는 언어는 나와 함께 단숨에 천상에 닿을 것이다. 별들이 언어로 반짝이는 미지는 지금 여기서는 읽을 수 없다. 이별이 제대로 이루어 질 수 있을 장소를 소읍의 여인숙으로 선택하기까지는 꼭 삶의 고통만의 문제는 아닌 듯하다. 소읍의 여인숙은 적막하다. 그 적막 앞에서 신발을 벗어 돌려놓고, 수첩에 말들을 혹독하게 가두어 함께 순장되기를 강요하지 않는다. 소읍의 여인숙에서 사람들이 슬프게 처절하게 만나던, 생의 마지막을 지켜봐주던, 언어의 시간은 사라졌다. 적막한 하늘에 별들만 총총하게 남아서 빛난다. 그 별들이 본래 소읍의 여인숙의 언어였던 것처럼, 저 밑바닥 받쳐주고 있던 변치 않는 아름다움처럼. 낡고 빛바랜 장소에서는 언어조차도 함께 퇴색하고 칠이 벗겨지고 낡아간다. 사람들이 가방을 싸고, 친구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고, 수첩에 자신의 행적을 남기는 행위들로 이별을 치루는 아름다운 낭만은 사라져버렸다.

그런 시대에 시인 또한 오지에 산다. 말과 글자와 사람과 사물이 따로 분리되어 각자의 시스템에 따라 생존해가는 기호의 세계로 진입한 세상에서 나는 주체로서의 지위를 누릴 수 있을까. 사물인 가방이 비워지면 그대로 소외되는 나는, 내 이름을 온전히 받아줄 가슴과 숙박계보다 더 많은 별이 빛나는 소읍의 여인숙이 그립다. 소읍의 그곳은 태초처럼 언어도 나도 새로 태어나게 할 테니까. 그런 만큼 멀리 있어 당도하기 어렵다. 말들이 곧 존재였던 근원적인 시공간처럼. (이순현 시인)

 

이순현_1996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내 몸이 유적이다』

 

※『미네르바』 2013년 겨울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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