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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계단을 오르다가 발을 헛디뎠습니다        
들고 있던 화분이 떨어지고
어둡고 침침한 곳에 있었던 뿌리가
흙 밖으로 드러났습니다
내가 그렇게 기억을 엎지르는 동안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내 안 실뿌리처럼
추억이 돋아났습니다
다시 흙을 모아 채워 넣고
앞으로는 엎지르지 않겠노라고
손으로 꾹꾹 눌러주었습니다
그때마다 꽃잎은 말없이 흔들렸습니다
위태하게 볕 좋은 옥상으로
너를 옮기지 않겠다고
원래 자리가 그대 자리였노라고
물을 뿌리며 꽃잎을 닦아내었습니다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윤성택 詩人의 詩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전문.



      -낡은 봄-

  봄인가…. 용케도 겨울에 얼어죽지 않은 기억과 이름들이 또 다시 푸릇푸릇 살아나서 푸른 들판처럼 출렁인다. 밟아도 꿈틀 살아나는 푸른 싹처럼 마음의 기억을 뚫고 솟아오르는 이름들….
  오늘은 아내와 함께 근처 농원을 다녀왔다. 나는 봄이라고 생각이 들었는데, 농원의 시간에는 아직 미열조차 없었다. 겨울을 간신히 버틴 화분들과 기껏 노란 수선화만 있는 농원. 아내는 몇몇 꽃의 이름을 주인에게 물어보는 동안 사람과 식물의 봄이 이렇게 다를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마음 속 봄에 성급히 끌어다 놓은 화분들이 그동안 번번이 얼어죽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렇듯 아직 들추지 말아야 할 마음을 덮고 있는 보온의 덮개를 들추어내는 일들이 “위태하게 봄을 옥상으로 옮기는 일”이라는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새삼 느껴졌다.
  봄이라는 계절에는 너무도 빠른 가속도가 붙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면의 시간이 너무 지루했던 탓도 있을 것이다. 붙어있는 가속도를 줄이는 지점이 바로 봄이 끝나는 지점이기도 하니 말이다. 모든 이들에게 제각기 그 봄의 지점이 다를 수 있다는 것과 한번쯤 엎질러진 봄을 아프게 주워 담은 경험이 있다는 것들. 한 포기의 그리움들이 제각각의 봄날에서 피었다 졌을 그 일들이, 꼭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해도 봄날의 가장 아름다운 꽃들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 여린 꽃잎 같은 기억들은 왜 또 그렇게 빨리 져버리는지. 꼭 여름에 빼앗긴 첫사랑의 풋풋한 바람 같이 말이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무위의 씨앗들을 골라낼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짧아질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어느 해에 가서는 더 이상의 꽃도 피어나지 않는 무위의 시간이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때가 기억이라는 화분 속 그 꽃의 원래 자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지점일지도 모르는 일. 아마도 그런 깨달음이라면 영원히 그 시간이 오지 않는 것도 좋겠다. 말없이 흔들리기만 하는, 여전히 아름다운 그대까지도 기억나지 않는 무위의 시간. 그때는 또 어떤 내용의 기억들이 쏟아져 나올까?  

- 박해람 시인의 '포엠피아'(중부일보 2004. 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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