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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계절의 문학 시평/ 오창렬 / 《문예연구》2006년 겨울호


문예지에서 시를 읽어가던 내 안에 ‘시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의문이 생겨났다. 시를 읽으면서도 시가 잘 보이지 않는 답답함 뒤에 생긴 그 의문은 오래 남아서 ‘시와 시 아닌 것’, ‘좋은 시와 나쁜 시의 차이’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올 가을에 발표된 시들이 내게 준 의문 형식의 첫 선물이었고, 이에 따른 상념은 선물에 대한 나의 서툰 반응들이었다.
상념은 두서없이 진행되었다. 시와 시 아닌 것의 차이는 1차적으로 운율의 유무에 따른다. 운문(韻文)이란 운율 중 우리 시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도 하는 운(韻)만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운(韻)은 사전에 “① 운자(韻字) ② 운향(韻響)”으로 풀이되었다. ‘운향(韻響)’이란 “시의 신비스러운 운치와 음조”이다. 전통적인 개념에 덧붙여 시를 ‘신비스러운 운치와 음조가 느껴지는 글’이라는 정의해 본다. ‘신비스러운’이라는 말의 추상성이 안개 속 같지만, 시잡지에서 시를 많이 찾을 수 있을 것도 같다.
나의 의문은 애당초 ‘시의 싹은 어떻게 생겼으며,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현대시의 싹이 운율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품격을 갖춘 멋’에서 오는 어떤 질의 감동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감동을 제공하는 멋의 품격에 따라 좋은 시와 나쁜 시가 가려질 수 있을 터이다. 멋 또한 운율보다도, 시어보다도, 어쩌면 이미지에 있을 것이다. 시가 던져 주는 이미지 한 장, 그것이 삶의 풍경에 가 닿을 때 독자는 한 편의 시에서 깊은 울림을 얻을 것이다. 시와 삶이 어우러지며 시도 깊어지고 삶도 깊어질 것이다.
우리는 이 같은 상념을 바탕으로 이 땅의 시인들이 보여주는 이 땅의 풍경들을 들여다보려 한다. 그 풍경들은 현대인의 삶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줄 것이고 그 상징은 우리의 삶을 밝혀줄 것이다. 시를 보자.  


농협창고

제 안을 스스로 까맣게 비워버렸다는 듯
창문 대신 덧대 박은 녹슨 함석을 걸어놓고
면사무소 옆 삼각지붕으로 서 있다
가로지른 자물쇠가 붙어 있는
벽들은 전국 어딜 가도 같은 누런색이다
인근 간판이 바뀌거나
낡은 집이 헐릴지라도 시간과 무관한 듯
한낮 창고 위 풍향계는 쉴새없이 돈다
깜깜한 내부 섬광처럼 뚫려 있는 못구멍들,
먼지의 환영이 내밀하게 가라앉는 그곳은
어둠보다 깊은 버뮤다 삼각지대 같다
사라진 빛들이 창고에서 창고로 이동하며
앞문으로 들어선 소년이 청년이 되어 나오고
뒷문으로 머리띠를 두른 노인이 걸어나온다  
전송되는 것은 세월뿐 아니어서
그 많던 포대는 시간의 벽을 통과해
몇 년 전이나 몇 년 후로 쌓여 있다
'결사'라는 붉고 서늘한 벽화를 보며
나는 죽음까지 관통하는 미래를 보는 것만 같아
다시는 열릴 것 같지 않은 자물쇠 너머
한사코 그 안을 들여다본 것인데
터널 같은 그늘에서 쩍쩍 금이 뻗는다

- 윤성택, 「농협창고」, 『실천문학』 2006년 가을호


농협창고는 농산물이나 농민이 필요로 하는 영농자재의 보관, 농산물 및 영농자재의 수급과 가격안정 등 영농생활과 관련된 기능을 수행하는 곳이다. 농협창고는 도시를 벗어난 곳이라면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시설물이다. 이 ‘농협창고’를 통해 시인은 농촌과 농민들의 삶을 묘사하고자 한다. 농협창고의 기능과 역할에 기대어 볼 때, 시인이 묘사하는 ‘농협창고’는 그대로 농촌과 농민의 오늘을 상징할 수 있다. 그 오늘은 어제를 지나와 내일로 이어질 오늘이다.
시인의 눈에 든 농협창고의 첫 번째 모습은 ‘창문에 녹슨 함석을 덧대 박고 선’ 모습이다. 그것은 창고 안이 비워져 까맣기 때문이다. 창문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창문’이란 안과 밖의 소통에 그 주된 기능이 있지 않던가? 안을 들여다보아 창고가 비어 있으면 ‘포대’를 들이고, 창고가 빼곡하면 곡식포대를 내어 돈을 바꾸지 않았던가? 안이 비고 바깥이 막혔으니 안도 밖도 무의미하다. 창문을 덮은 ‘함석’은 그 폐쇄의 이미지로 창고의 기능소멸을 선고한다. ‘녹슨’은 그 기능소멸과 폐쇄의 기간이 길었음을 의미한다.
창고는 “제 안을 스스로 까맣게” 비웠다. 창고가 텅 빈 상황은 ‘까맣게’라는 말 그대로 암담한 농촌의 절망적인 현실상황이다. 필시 농촌 내부 실상의 상징일 농협창고의 깜깜한 내부를 화자는 “섬광처럼 뚫려 있는 못 구멍들”로나 보는데, 그곳은 “어둠보다 깊은 버뮤다 삼각지대 같다.” 못이 빠진 자리인 ‘뚫린 못 구멍’, 붕괴의 틈을 통해 본 죽음의 공간에선 소년이 죽어 청년이 되어 나오고, 청년이 죽어 유령처럼 노인이 걸어 나올 뿐이다. 세월만이 사람을 지나 흐를 뿐, 농협창고에서 화자는 어떤 인물 어떤 구체적이고 역동적인 행위도 찾아볼 수 없다.
‘머리띠’와 “<결사>라는 붉고 서늘한 벽화”가 암시하는 농촌 주체들의 결연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붕괴되고 폐쇄된 농협창고/농촌의 현실에 대한 화자의 태도는 “다시 열릴 것 같지 않은 자물쇠 너머 / 한사코 그 안을 들여다” 보는 데에 나타난다. 그러나 안타까움과 연민의 시선 너머 “터널 같은 그늘에”는 ‘쩍쩍’ 금이 뻗을 뿐이다.
그리고 그 균열과 붕괴는 “전국 어딜 가도 같은” 현상이다. 하나로 모인 것은 그 실상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일 뿐이다. 농촌이라는 이웃이 죽어가는 현실을 외면하는 사람들, 그들은 어디에서 무얼 하며 사는가?

- 이후 후략 -

■ 오창렬
전북 남원 출생. 전북대학교 국문학과와 동대학원 국문학과 졸업(「신석정시 연구」로 문학석사 학위). 1999년 계간시지 『시안』신인상에 「하섬에서」등 5편이 당선되어 등단. 현재, 상산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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