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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리뷰 - 박송이 평론가 《시와정신》

2007.03.20 18:30

관리자 조회 수:4049 추천:74

시집 리뷰 - 박송이 《시와정신》 2007년 봄호


  삶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응시의 미학

  박송이

  우리의 삶 속의 ‘나’와 ‘너’의 경계가 분명해지고 있다. 현대인들은 자기 소외 의식을 경험하고 있으며 항시 삭막한 ‘시간의 굴레’ 속에 얽매여 살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질서를 형성하면서 그 속에서 규율과 법을 지키며 그 흐름에 맞추어 살아간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계속적으로 기계화된 현대 사회의 추세를 따라가면 그들의 삭막감과 소외감은 깊어질 수밖에 없고, 심각한 ‘병적 징후’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자기 내면과의 소통 부재와 상통한다. 인간은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실현하고픈 욕망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것인가.  

(중략)

  1990년대 이후 우리의 시단은 사색과 명상과 환상과 침잠의 자세로 삶을 응시하는 관조의 시대로 접어든 느낌이라고 했다. 이는 우리 시대 대다수 시인들이 내면세계의 응시와 사회비판 의식을 성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인은 세계에 대한 지속적인 응시와 사회비판 의식의 ‘관계’를 돈독히 맺는다. 이로써 흔해빠진 존재에 불과한 것들을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존재’로 이끌어 올린다. 그리하여 시인은 온갖 삼라만상에 깊은 애정을 품고 살아야 하는 천형을 지닌 존재들임이 확연히 드러난다.

(중략)

  윤성택은 현대문명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 정신의 참상을 침착하게 드러낸다. 시인은 미래파적인 형식 실험을 벗어나 세계와 자의식의 관계를 구체적이고 꼼꼼하게 형상화한다. 시인은 ‘어둠’과 ‘빛’을 통해 어둠의 억압적 성질과 빛의 저항적 속성을 중심기제로 삼고 있다. 이러한 썰물과 밀물처럼 몰아내고 밀려들게 하는 원초적인 힘으로 풍부한 기표들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시인의 내면에 천착한 언어와 대상들에 대한 집착과 애정이 이 현실세계를 이끌고 가는 원동력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시인은 현실의 물리법칙을 위배할 수 없는 프로그램화로 구성되어져 있기 때문에 “있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 실시간의 배열”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시인의 자의식은 현실세계의 ‘숙명적’인 구조의 영역을 인식하면서 지속적인 불안감을 갖는다. 그리하여 존재의 억압을 계속적으로 역행하여 자기의식에 직면한 한계를 초월하고자 한다. “길이와 폭으로 / 테두리를 두르던”(「대학병원 지하주차장」) ‘지하 주차선’으로부터 벗어나 어둠의 침묵을 깨고 “지상으로 올라”가고자 한다. 그러나 생각이 멈춰 있는 그 속은 “달이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세상이다. 끝까지 꿋꿋함을 지니려는 시인의 결연의 태도는 편견의 기억을 따라 “잠들기 전 도시와 거리, 사라진 저녁들”의 형체를 찾아 나서지만 의식적 존재로서의 ‘나’는 어디에도 찾아 볼 수 없다.

  시인은 일시적으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달의 ‘환영’처럼 세상에 머물면서 애초부터 구조의 필연적 통제를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이다. 시인은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서로 간의 소통의 거울인 ‘커뮤니티’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예전의 ‘소통’의 개념은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의식이었다. 그러나 지금 현대인의 공동체 의식은 물질문명화 속에 개인화의 의식이 뿌리 깊게 녹아져 있다.

        로그인을 했다가 로그아웃하면/ 육안으로 보이는 곳에서도 나는 없다
        내가 사실로 존재하는 것은 / 경계에 접속된 순간뿐이다
        어디에도 있는 나를 / 어디에도 없게 하는 로그아웃,
        나는 태연하게 다른 곳으로 로그인된다
        - 「로그인」부분

  현대인들은 정보의 바다 속, 즉 PC(개인용 컴퓨터)통신 화면 속에서 주체적인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것이 용이해졌다. 해가 더해 갈수록 사람들은 접속 기능 수단을 통해 다발적이고 쌍방향적 대화를 나누고 뜻만 있으면 어느 공간에서든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접속 환경 속에서 누구나 그 공간을 가입하고 탈퇴할 수 있는데, 우리는 데이터화 된 전산기기 속에서 연합의 자율 구조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통신수단은 ‘너’와 ‘나’ 사이의 경계를 풀어 놓고 ‘우리’라는 공동체 공간속으로 불러들인 것 같다. 그러나 시인의 말대로 이렇게 ‘로그인’(접속)했던 문명 수단의 소통 공간에서 ‘로그아웃’(폐쇄)해 빠져나와 현실세계로 돌아와 보면 ‘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다.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면 실제 현실 속에 흩어져 있던 의식들이 제 기능을 하는데 무리가 따른다. 실재하지 않는 공간을 기억하는 의식과 현실의 의식을 구분짓지 못하면 ‘로그아웃’ 후에도 ‘나’와 ‘너’의 괴리감은 심각해진다. 네트워크 커뮤니티는 일방적으로 대상을 임의적으로 인정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작용할 뿐 실제는 “복잡한 무늬의 데이터”(「창고 속 우주」) 속에 부유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자아의 행로는 현실세계를 도피하려는 의식과도 연관된다. 시인은 지속적으로 또 다시 ‘다른 곳으로 로그인’하여 자신의 동일화를 찾기 위해 연결 관계의 선을 놓지 않는다. 인간 욕망 가운데 끝없이 자기 동일화의 추구와 내면의 상처를 계속적으로 은폐하면서 회복하려는 이중 본능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시 전반적으로 정보망 속은 물론이고 현실세계 관계들이 멀어지고 있다는 ‘간극’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대상들 간의 소외를 “입 벌린 어둠 속”(「스테이플러」)에서 보고 ‘나’와 ‘너’ 사이의 거리감을 인지한다. 그리하여 시인은 균열의 조짐에 초점하여 그 틈의 중심으로 비집고 들어가 “빽빽하게 들어찬 어둠을 솎아내”(「대학병원 지하주차장」)고자 한다. 시인이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운명론적 관계들은 경험의 구체성을 통해 선명히 드러난다. 삶의 공간에 불가피하게 기생하는 ‘경계’의 속사정을 고집스럽고 끈질기게 추적한 결과 시인의 삶에 포착된 관계 사이의 ‘균열의 발견’이 그것이다. 사실 자신과 타자를 완벽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존재들의 모습을 자기 타자화로 축소하여 그 속에 거주하면 상처는 “그렇게 서로 부대끼며 천천히 가벼워지는 것이”(「탈수 오 분간」)고, “축대는 무너져 내릴 순간까지 / 금과 금을 이어”(「접속」)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이 이 단단하고 견고한 ‘간격’을 무너뜨리고자하는 힘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어둠에 익숙한 이 동네에서는 / 몇 촉의 전구로 스스로의 몸에 /
        불을 매달 수 있는 것일까 … 중략 … 어두운 방 안에서
        더듬더듬 스위치를 찾을 때 / 나도 누군가에게 건너가는 먼 불빛이었구나
        - 「산동네의 밤」 부분
          
         산소절단기 끝에 불꽃이 튀고 있다 / 그는 물끄러미 안을 들여다본다 /
        먼지와 섞여 소용돌이치는 불빛        
        - 「한밤의 제우스」 부분

  시인은 기존의 규격의 틀을 벗어나 세계와의 관계 속에 규정되는 ‘어둠’의 존재들에게 관심의 눈길을 보낸다. 시인은 어둠이라는 공간 속에서 살아있는 “소용돌이치는 불빛”의 존재를 감지한다. 시인에게 어둠과 불빛은 별개가 아닌 하나로 이어지는 필연적인 관계이다. 이러한 어둠 속에 내재된 불빛 같은 생의 끈질긴 욕망을 이끌어 내어 어둡고 소외된 어둠의 근성을 타오르게 한다. 어둠은 ‘너’와 ‘나’의 소외된 내면의 상처를 보여주는 동시에 그것을 허물어트릴 수 있다는 관계의 회복성까지 내포하고 있다. ‘옥상 균열’(「장안상가」)의 ‘금의 끝점’으로 “담쟁이는 / 건물 균열을 타고 자꾸만 뻗어올라”가고, “폐쇄된 벽과 벽을 스멀스멀 더듬”어 오르는 담배연기의 ‘허연 공포’ 역시 “사람 / 사이를 귀신처럼 배회하고 있다”(「담배연기」). 이러한 시인의 시적인 형상화는 ‘나’와 ‘너’의 “경계의 타성”을 벗어나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뜻밖의 만남을 기대하기에 가능하다. ‘어둠’과 ‘불빛’의 지속적인 탈중심화를 통해 어둠을 지켜내면서 그 안에 있는 불빛의 힘을 드러내고자 한다. 어둠을 더듬더듬 찾다보면 “뜨거운 것이 온다”(「접속」)고 하지 않았던가.

  시인의 말대로 우리는 재단되어진 ‘세로축’과 ‘가로축’이라는 ‘루빅스 큐브’의 공간에 살면서 ‘정육면체 색조각’의 한 면만을 맞추고 살았다. 그러나 이러한 의식과 구조의 기반을 ‘기적적으로’ 부숴 버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부에 자리한 단절의 벽을 깨뜨려야 한다. “이 生 을 분해해 조립하지 않는 한” “우리는 잠시 잇댔다가 어긋나는 여정”을 걸을 수밖에 없다. 자의식의 소외와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가 “불씨 하나씩 달고 있”)「산동네의 밤」)어야 한다. 그리하여 벽에 금 간 그 틈 속으로 애정어린 관심을 스미게 하고 서로의 간격의 거리를 좁혀야 한다.

  “공사장 보도블록 사이”(「홀씨의 나날」)에 날아온 연약한 ‘홀씨 하나’까지 우리가 그 곤경한 지점으로 스며들어간다는 것은 대상과 단절을 뛰어넘어 자신과 타자의 구분이 아니라 차츰 서로에게 ‘물들’(「리트머스」)어가고 ‘젖’어 들어감이다. ‘너’와 ‘내’가 소통할 수 있는 사각 공간 지대의 ‘공중전화부스’ 안도 “네가 어디에 있는지 나는 알아야”(「한강에서 고래를 보다」)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사각 틀 속에서 시간의 ‘한계’를 벗어나 ‘신호음 저편’에 관심을 가졌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너’에게 젖어들어 간다. 신호음이 젖어든 아득히 먼 곳 어디든 관계없이 시인의 관심어린 애정이 살아 있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저 편 어딘가의 그리운 것들이 금세라도 선명하게 달려와 대답해 올 것이다.

  시인 내면에 “나는 썩지 않을 것이다”(「버려진 인형」), “CCTV안, 나는 아직 살아 있다”(「지하에서의 실종」), “나는 끝까지 결연하다”(「시간의 이면1」)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단절과 고립의 시대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꿋꿋이 잃지 않으려고 결연하는 한 시인 앞에서는 어둠도 한 점 빛이 되지 않겠는가. 내면세계와 현실세계의 ‘그리움’의 간격을 온몸으로 물들이고 있는 완곡한 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린다. “공중전화부스에서, 나는 아직 여기 있다고.”                      


* 박송이 / 인천 출생. 공저 『현대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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