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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리뷰 - 남기혁 평론가 《문학동네》

2007.03.02 15:53

관리자 조회 수:4021 추천:87

<시집 리뷰> 中/  남기혁/ 《문학동네》 2007년 봄호


  첫 시집 『리트머스』를 통해 윤성택이 펼쳐 보인 세계의 풍경은 우울하다. 그의 시선은 세계의 중심, 혹은 일상적인 삶의 질서 밖으로 쫓겨난 타자들을 향한다. 가령 「검은 비닐 가방」에서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한 ‘사내’가 그러하다. 이 사내는 기차역 대합실에 홀로 남아 있다. “막차가 떠났는데도 꼼짝하지 않”고 의자 깊숙이 몸을 누이고 있는 이 사내를 보면서 시인은 “환한 뼈의 숲으로 가는 길”을 떠올린다. 「후회의 방식」의 시적 화자는 지하철역에 진입하는 전철을 향해 몸을 내던진 “돌이킬 수 없는 시간”속에 있다. 시적 발화는 그 사나이가 “마지막으로 공중에서/ 허공을 찢는 호각 소리를” 듣는 그 정지된 순간에 고정되어 있지만, 그 순간 그는 자신이 살해한 “당신”을 떠올린다. 죽음(혹은 이별)에 임박한 자, 혹은 죽음을 선택할 만큼 어떤 한계상황에 처한 자들이 바로 윤성택의 시선에 포착된 타자들의 우울한 삶의 풍경을 이룬다.

  하지만 ‘타자’를 바라보는 윤성택의 시선은 비정하지 않다. 비정함이란 대상에 대한 냉소적 거리를 전제로 한다. 그는 ‘거리’를 가지고 대상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거기에는 늘 “인간적인 시선”(김수이, 「현실의 균열들 속에 존재/ 부재하기」,129쪽)이 개입한다. 그는 인간적인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는 관찰자이다. 이 관찰자는 타자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관찰자의 시선과 결합시킨다. 표제시(「리트머스」)를 보기로 하자. (시 생략)

  이 시에서 시적 화자의 시선에 포착된 주인공은 “늦은 밤 공중전화부스”를 찾은 외국인 노동자이다. 시적 화자의 시선에 주인공이 포착되는 순간, 그 지점에서부터 무궁무진한 서사가 생성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 가족에 대한 사랑, 외국인 노동자의 신산한 삶 등등. 서사적인 씨앗을 품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이루는 “실루엣”이 시인의 시선에 포착되면서, 우울한 이 세계의 풍경들은 “한 가지 색으로 반응해 물들어간다”.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공중전화부스가 그리움과 반응해 빚어내는 “한 가지 색”은 바로 “봉숭아꽃” 같은 붉은색이다. 이 처절하면서도 아름답고 뜨거운 것, 그리움. 윤성택의 시적 언어는 그렇게 아름답고 뜨거운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다.  

  윤성택은 충실한 서정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비정한 도시의 풍경을 거닐면서, 그 풍경 너머에 어떤 근원적 세계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견지한다. 자본과 물질이 지배하는 이 세계가 이미 처절하게 부정해온 것들, 그 ‘유기체적인 것’들에 대한 기억은 이 세계의 폭력성을 드러내는 방식일 수도 있다. 그에게 시쓰기는 “그리운 것들은 우회로에 있다”(「주유소」)는 믿음으로, 그 ‘우회로’를 찾아나서는 일이다. 「농협 창고」의 시적 화자가 “낡은 집이 헐릴지라도 시간과 무관한 듯” 서 있는 낡고 오래된 ‘농협 창고’를 보면서 “죽음까지 관통하는 미래를 보는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사라져가는 것, 죽음에 내몰리는 것, 잊혀진 것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서정적 비전을 길어올린다. 이러한 서정적 비전은 자칫 근원의 시간들을 이상화하거나 신비화할 수 있는, 유토피아에 대한 나쁜 믿음에 빠질 수 있는 위험이 있다.

  하지만 윤성택은 소박한 생태주의나 서정주의에 빠지지 않고 동시대의 비판적 담론과 결속한다. 그것은 유기체적 상상력을 전도시킴으로서 가능했다. 가령 「아파트나무」에서 시인은 ‘아파트’라는 물질적(비유기체적) 존재를 ‘나무’라는 유기체적 존재와 결합시킨다. 마치 ‘나무’가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 아파트는 한 층씩 건축되어 마침내 완공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아파트가 해를 가린 즈음부터” 매일 매일 자라야할 ‘나’는 “더이상 자라지 않았다”. 비유기체적인 것이 마치 유기체처럼 무한히 증식할수록, 정작 생명을 가져야할 것들은 그래서 자라나야 할 것들은 생장을 멈추어버리는 것이다. 비유기체에서 의해 생명을 위협당한 유기체가 다시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아파트가 자라지 않는 외곽”으로 떠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중심에서 밀려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심에서 밀려나는 타자의 삶을 선택함으로써 비로소 ‘나’는 비유기체적인 것의 폭력성과 억압성을 고발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상상력의 전도는 「동물원」에서도 발견된다. “동물원”은 “과거만이 진실”한 세계이다. 동물원에 갇혀 관람거리로 전락한 동물들은 “떠나온 숲과 늪”에 대한 그리움조차 거세당한다. 그들은 “철근으로 지탱되는 두려운 눈빛”으로 상징되는 감시의 시선과 근대 문명의 억압 때문에 “본능의 신경계”마저 잃어버린 채 사람들이 “호명하는 목소리에 반응해간다”. 기계적인 것, 인공적인 것, 현대적인 것의 폭력성은 동물에게 야생의 본능을 완전히 앗아간 것이다. 이제 동물원에 남아 있는 유일한 “진실”은 “과거”뿐이다. 그들이 떠나왔던 “초원”과 “숲과 늪”에 대한 기억 말이다. 유기체적인 세계에 대한 기억만이 진실인 이 “동물원”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대한 알레고리라 할 수 있다.

「로그인」에서 윤성택이 그려내는 시뮬라시옹의 문화 역시 그러하다. 무기체가 유기체를 지배하고, 가상이 실재를 대체하며, ‘나’의 이미지가 ‘나’를 대신하는 시대. 그러한 시대에는 ‘과거’에 대한 기억을 통해 정체성의 서사를 유지할 수 있는 ‘자아’가 사라진다. 기억과 서사를 빼앗긴 ‘자아’는 “가상현실처럼 시뮬레이션”(「시간의 이면 1」)될 뿐이고, 그에게 “프로그램화되어 있지 않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나’는 “현실의 물리법칙”이 강요하는 ‘나’의 죽음에 대해 “끝까지 결연”하게 맞서보지만, 이 결연한 대결은 그이 승리로 끝날 것 같지는 않다. 윤성택의 시쓰기는 이러한 우울한 시대의 “풍경에 스트로를 꽂”(「장마 이전」고, 그 풍경으로부터 근원적 세계에 대한 그리움과 그것이 충족될 수 없을 것이라는 문명 진단을 함께 제시하는 데 바쳐지고 있는 것이다.



남기혁    
1964년 경기도 용인 출생. 1994년 『현대문학』 평론 부문 신인상을 받으면 등단. 현재 군산대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중. 저서로 『한국 현대시의 비판적 연구』 『한국 현대시와 침묵의 언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