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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시평(문학나무 봄호, 이승하 (시인/ 중앙대 교수)(252쪽)






시의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가



  21세기가 된 지도 1년이 지났다. 우리 시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문예지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일반 독자는 좋은 시가 없다며 문예지와 시집을 외면하고 있다. 간혹 큰 서점에 가보면 시집 코너는 늘 한산하고, 간혹 손님이 계산대에 갖고 가는 시집은 그 이름이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베스트셀러 시집'을 펴내는 시인의 시집이다. 문학평론가에게 부과된 의무가 있다면 매달 매 계절 쏟아져 나오는 문예지에서 '좋은시'를 찾아내어 제대로 평가해주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 시인의 등단 지면·발표 지면·안면·학연·지연 등을 염두해 두지 않고 공정한 입장에 서서 평가하기란 기실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옛 사람의 지혜로운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 자신을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매다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시에는 두 가지 어려움이 있다. 탁자(琢字)와 연구(鍊句)에 숙달하는 일과 사물을 본뜨고 정서를 묘사하는 일들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오직 자연스러움이 첫째의 어려움이요, 깨끗한 여운을 남기는 것이 두 번 째 어려움이다.

  정약용이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서 한 말이다. 다산은 시어를 조탁하고 시구를 연마하는 것이나, 사물과 정서를 잘 묘사하는 일이야 웬만큼 수련하면 가능하다고 보았다. 좋은 시 쓰기가 어려운 것은 지나친 꾸밈새로 말미암아 자연스러움에서 자꾸 벗어나기 때문이며, 깨끗한 여운을 남기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일 터인데, 공감이 가는 말이다. 서거정이 『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 한 다음과 같은 말도 가슴에 새기고 있다. "시는 마땅히 기절(氣絶)을 앞세우고 문조(文藻)는 뒤로해야 한다." 시인의 기개와 절조, 즉 시정신이 중요한 것이지 언어 조형력, 즉 기교가 그에 앞서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동양의 시학이다.
  서구의 상징주의와 주지주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이후 우리 시는 '정신의 시'를 버리고 '기교의 시'를 열심히 배우고 학습했던 것이 아닐까. 정말 좋은 시는 양자의 선미한 결합, 다시 말해 기법에서 있어서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이요 정신에 있어서는 사무사(思無邪)의 경지에 이른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보들레르의 만물조응(萬物照應)이나 랭보의 견자(見者)의 시학이 오로지 기교에만 국한된 시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보들레르는 시인의 존재 의의에 대해서, 특히 사물에 대한 감각과 사물과의 교감에 대해서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랭보는 보편적 영혼에 이르기 위한 착종의 감각을 중시한 견자의 시학을 들려주었다. 글쎄, 정신의 깊이가 아니라면 감각의 눈부심, 이미지의 떨림을 전해주는 시가 나와야 될 터인데 그런 시를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중략)……

자, 여기에도 그럴듯한 소재가 있다. 두 다리 없는 사내가 바퀴 달린 판자 위에 엎드려 있다면 그럴듯한 소재가 아닌가. 찬송가가 흘러나오고, 동전 바구니가 보이고, 사내는 마스크를 쓰고 있다. 이런 소재를 갖고 시를 쓸 때, 즉 타인의 고통을 시의 소재로 갖고 올 때, '소재주의에 머문 작품'이라고 욕을 먹기가 쉬운데……. 작년에 등단한 신인 윤성택의 시이다.




        흔적


        두 다리가 없는 사내는
        바퀴 달린 판자 위에 엎드려 있다
        그가 밀고 가는 삶에서는
        찬송가가 흘러나오고
        동전들 굴욕의 또 다른 얼굴처럼
        바구니에 들어 있다
        손이라도 밟힐 때면
        올려다보는 그의 아랫눈동자가 희번덕거린다
        무리의 행인이 건널목을 건너자
        그는 마스크를 내리고
        누런 가래침을 뱉는다
        그때마다 핏줄 같은 전선을 따라
        고무 속에서 흔적 없는 다리가 꿈틀거린다

        지친 배를 시멘트 바닥에 깔고 있는 것은
        세상을 품고 산다는 것일까
        언젠가는 그의 꿈이 부화되는 것일까
        어쩌면 그는 밤마다
        고무 속에서 완성 되가는
        희고 단단한 다리로 生의 건널목을
        건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한낮 노래를 읊조리며
        가장 낮은 세상을 굽어보는 건지도 모른다

        그가 느릿느릿 자리를 옮길 때
        쓸리는 바닥, 닳은 고무 틈새로
        햇빛이 꺾여 들어가고 있다.

                                        ― 「흔적」


  「흔적」(『현대시학』,2002. 1)의 제1연은 다리 없는 걸인에 대한 관찰 기록장에 지나지 않는다. 제2연에 가서 시인은 몇 가지 상상을 해본다. 바퀴달린 판자 위에 엎드려서 기어다니므로 '지친 배를 시멘트 바닥에 깔고' '세상을 품고' 사는 것이 아닌가. 흡사 닭이 달걀을 품어 병아리를 만들 듯이 그의 꿈이 언젠가는 부화되는 것이 아닌가. 꿈속에서는 '희고 단단한 다리로 生의 건널목을/ 건너는' 그. 그래서 가장 낮은 세상을 굽어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닳은 고무 틈새로 햇빛이 꺾여 들어가고 있는 마지막 행은 해석의 여지를 남겨놓는다. 비록 '흔적 없는 다리'이지만, 닳은 고무 틈새로 햇빛이 꺾여 들어가고 있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햇빛도 꺾는다? 닮은 고무 틈새에서는 숙연함을 느껴 햇빛도 고개를 숙인다? 다소 모호하게 종지부가 처리된 것이 아쉽다. 이 시를 살리는 것은 소재가 아니라 시인의 상상력이다. 우리 주변에 많고 많은 사람과 사물 가운데 어떤 것을 시의 소재로 가져오기는 쉽지만 그것을 '시'로 만드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체험과 상상력의 적절한 버무림이 이 시를 맛깔스럽게 만들었다.
  
……(중략)……

시의 감동이란 소재와 주제, 혹은 내용과 표현의 어느 한 부분이 잘되어서 올 때보다 두 가지 이상이 조화를 이루었을 때 훨씬 강해짐을 몇 편의 시를 보며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