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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주빛 소파에 부쳐

2004.05.31 16:26

윤성택 조회 수:1620 추천:9


  루빅스 큐브 / 윤성택

  정육면체 색조각을 돌려가며 맞추는 루빅스 큐브라는 퍼즐, 나는 아직도 한 면밖에 맞추질 못한다 다른 면들을 모두 뒤섞은 채로 살아왔다 정거하러 들어오는 지하철 창에 그녀가 있었다 칸칸이 교차하다가 그녀의 칸이 내가 서 있는 창 앞에 멈췄다 열차 유리창과 유리창 열차 사이, 그녀와 눈빛이 일치했다 세로축 계단과 가로축 정차역이 각기 회전하다 멈춘, 검은 눈동자가 몇 백 년을 건너온 듯 흔들리고 있었다 한 면이 다른 전면을 맞춰내기 위해, 우리는 잠시 잇댔다가 어긋나는 여정이었을까 루빅스 큐브 한 면만 겨우 맞춰온 내가 그녀를 다시 본다는 것은, 이 生을 분해해 조립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하철은 떠났고 그녀와 단 몇 초간, 아마도 평생이 흘렀다


나의 자주빛 소파에 부쳐

- 『나의 자주빛 소파』, 조경란, 문학과지성사(2000)

윤성택

  당신의 편지를 전해 받은 것은 겨울이었습니다. 당신이 종로 D서점 팬시용 명함코너에서 근무하고 있을 때 일주일마다 이름을 바꿔가며 명함을 만들어가던 친구에게서 입니다. 여름에 그가 만기출소를 하면서 한 묶음의 편지를 건네주고 갔습니다. 당신이 뜨개질 솜씨가 좋다는 것도, 달걀말이김밥을 좋아하는 것도, 짧아진 외투를 입고 있던 사진도 그 편지묶음에 담겨져 있었습니다. 친구는 당신과 저녁약속 하던 그날, 오후 3시쯤 체포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명함을 만들러가던 날이었지요. 그러니까 <편지를 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후에도 몇 년이 더 흘렀군요.

  3차원 퍼즐 큐빅 정육면체 <루빅스 큐브>, 얼마 전 TV에서 한 손으로 퍼즐을 돌려 맞추는 프로그램을 보다가 공짜로 받은 이 공구를 서랍에서 다시 꺼내보게 되었습니다. 헝가리 루빅이라는 건축학 교수가 1975년 발명한 것인데, 처음에는 학생들에게 3차원의 개념을 이해시키기 위해 개발되었지만 지금은 루빅스 큐브 빨리 맞추기 세계대회가 있을 정도로 유명한 세기의 장난감이 되었습니다. 이 큐브는 한번 흩어놓으면 특별한 공식을 대입하기 전에는 인간의 감각으로는 다시 맞출 수가 없을 정도로 조합의 수가 많다고 합니다. 지하철 그날 이후 당신을 우연히 다시 만날 수 없는 이유와도 같은 걸 겁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내가 앉아 있던 창가를 지나다녔던 사람들 중에 당신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17p)>, <그래요, 그렇다면 사람이 사람을 알아본다는 것은 운명과 운명이 만난다는 말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서로를 지나치기도 합니다.(20p)> 그래요, 루빅스 큐브를 만지작거리다가 당신이 편지에 썼던 말처럼 운명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섯 색깔 각 아홉 개의 조각들이 같은 색으로 모두 조합되기 위해서, 가로와 세로로 엇갈리고 비껴가는 과정들. 그 일련의 과정들이 여섯 전면을 맞춰내기 위한 수순이었다면, 어쩌면 지하철 상행과 하행 칸이 맞닥뜨린 순간도 당신과 내가 어떤 질서에 의해 운용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친구는 일주일에 한번씩 명함 이름을 바꿔 행세를 하다가 결국 사기죄로 붙잡혔지만,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이 생의 이름도 언젠가는 새로운 이름으로 다시 불려질 것입니다. 적어도 친구는 일주일마다 박민철, 이석호, 정찬기, 정찬수, 오정수라는 이름으로 충실하게 살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이름 박숙자도, 내 이름도 이 생을 충실히 살다갈 시간의 명명 방법일 뿐입니다. 어쩌면 친구는 일주일마다 다른 이름을 가진 수상한 남자를 묵묵히 지켜봐준 이유만으로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당신 말대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 다르지 않습니까.(22p)>

  루빅스 큐브를 이리저리 맞춰보았습니다. 한 면을 맞추는 것은 쉬운데 다른 면과 같이 맞추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다 차근차근 설명서를 들여다보며 똑같이 따라해 보니 신기하게 맞춰지곤 했습니다. 그렇게 몇 번을 하다보니 설명서에 써진 것은 공식이라기보다는 과정을 익히는 것 같더군요.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든 조합을 맞춰가는 과정은 같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설명서에 써있는 것을 머릿속에 다 기억하고 빠른 시간 안에 퍼즐을 맞추려고 합니다. 세계 신기록이 20초 안팎이라던데, 점점 시간을 단축시켜 몇 분 안에 다 맞추어버리는 게 최종 목표입니다.

  당신은 지금도 우연을 믿지 않을까요. 우리가 스쳐 만났던 그 순간은 우연이 아니라 먼먼 과거에서부터 준비되고 이어져온 과정인 것일까요. 당신의 글을 들여다보게 됩니다. <저는 우연을 믿지 않습니다. 다만 오랜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혹시라도 남자가 마음을 바꿔 약속 장소로 나오지는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답니다. 그 남자는 여태도 이 도시 어딘가를 떠돌며 매일 다른 이름으로 바꿔가며 살고 있을까요.(32p)> 루빅스 큐브에 심취하면서 당신과 내가 만났을 때의 확률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내가 자주 이용하는 지하철 6개 노선, 지하철 앞쪽부터 뒤 9량까지 당신이 그 칸에 있다면 같은 시각  6개의 지하철 중 당신과 내가 만나기 위해서는 43,252,003,274,489,856,000의 조합의 수를 거느려야합니다. 아, 물론 모든 칸에 있는 사람들의 인연을 흩어놓지 않고 말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가로축과 세로축의 회전각을 가지며 시공간에 존재하는 좌표일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뜨개질을 즐겨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당신이 만들었던 스웨터나 털모자, 숄은 지금 누군가의 것이 되어 몇 번의 겨울을 지났을까요. <뜨개질할 때 중요한 건 익숙한 솜씨가 아니라 집중력과 인내심이에요. 잠시만 딴 데 정신을 팔아도 겉코뜨기해야 할 때 안코뜨기가 돼 있고 그러다 보면 무늬는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지요. 사실 뜨개질도 생각처럼 쉬운 것은 아니랍니다. 한 코만 놓치거나 실수를 해도 금방 표가 나고 틀린 자리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니까 말이지요.(14p)> 뜨개질에 대한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예전에 보았던 「큐브」라는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뜨개질 한 코 한 코가 큐브의 방과 방 사이의 연결로 여겨졌으니까요.

  그 영화의 내용은 하나의 큐브와 연결된 여러 개의 큐브 중 안전한 방을 수학적 근거로 찾아나가야 되는데, 안전한 방이 아니면 칼, 약품이 쏟아져 희생이 잇따랐습니다. 그런데 2편에 가서는 상자의 개념이 아닌 하이퍼 큐브 개념이 나오더군요. 말하자면 움직이는 사각형입니다. 그것도 단순히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같은 시간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가 존재하는 공간, 한 가지 일에 여러 가지 결과가 공존하는 상대성원리의 공간입니다. 그리고 큐브를 옮겨갔을 때는 또 새로운 일에 대한 여러 가지 결과가 공존하는 공간으로 바뀝니다. 시간이 흘러가는 가운데 매순간 과거와 미래가 함께 하는 공간이 영화의 내용이었습니다. 당신이 뜨개질로 사나흘 걸려 꼬박 완성할 수 있었던 아이들 스웨터도 어쩌면 코뜨는 공간의 배열과 그 뜨개질할 때 환경의 수가 포함된 결과물이겠지요. 어쨌든 당신과 나 사이에는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미래의 내가 수많은 경우의 수에 따라 시공간을 변화시키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날 지하철에서 당신과의 만남을 기억하는 이유는, 한때 당신이 기다렸던 그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루빅스 큐브의 세로축처럼 계단을 따라 내려오다 구두끈을 고쳐 매는 시간도, 잠시 복권방을 기웃대던 시간도 포함되었습니다. 가로축의 지하철 구내에서는 가운데까지 터벅터벅 걸어갔던 곳과 경로석 출입구를 비껴선 것까지 모든 경우의 수가 준비되었습니다. 상행 지하철은 서서히 들어섰고 당신이 탔던 하행 지하철은 반대편에서 막 정차하고 있었습니다. 열차에 들어가 반대편 출입구 쪽에 기대 서 있는 순간, 당신도 역시 차창에 기대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신의 눈빛은 언젠가 당신이 말했던 <언제 다시 우리가 만나게 된다면 그때 당신은 제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까요(33p)>물음처럼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여전히 그 옷을 입고 있더군요. 검정색 나일론과 폴리에스테르로 만들어진 무릎 선까지 내려온 외투.

  당신은 분명 나를 알아보지 못했을 터인데 왜 뚫어져라 쳐다보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당신도 왜 나를 그렇게 바라보았는지도요. 정지된 듯한 시간, 내 일생을 통틀어 가장 긴 시간이 지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어쩌면 전생 어디선가는 평생이었을지도 모를, 시간이 유리창과 유리창 사이를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먼 훗날 당신과 나의 완전한 만남을 위해 그렇게 잠시 비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까요. 몇 백 년 만에 그렇게 또 다시 이별이었을까요.

  그날 저녁 친구를 포장마차에서 만났습니다. <편지를 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야기를 하더군요. 친구는 재소자들의 법 판정이 인간적으로도 죄인이 되어야하는 것에 대해 못마땅해 했습니다. 친구가 중형이 아니라는 것은, 당신과 연락이 끊겨 아실 터입니다. 대부분 그 모임의 편지는 출소로 인해 답장이 끊겼을 테니까요. 아직 재활교육을 통해 적응하지 못한 친구가 안쓰럽습니다. 미안하지만 당신 얘기는 아직 하지 못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집에 돌아와 술에 취한 채 루빅스 큐브를 드라이버로 분해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맞추질 못하고 잠들었습니다.

  겨울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당신이 뜨개질 했다가 풀어낸 스웨터를 다시 완성할 수 있을까요. 물론 <뜨개질하기 까다로운 솔잎뜨기 무늬를 뒤판까지도 촘촘히 떠넣은(29p)> 낙타색 스웨터로 말입니다. 그리고 그 겨울에 입었던 외투를 입고 친구를 만나주지 않겠습니까. 친구는 지금 광화문 K문고와 세종문화회관을 잇는 지하도에서 루빅스 큐브를 팔고 있습니다. 꽤 많은 노점상이 있지만 열심히 살아내고 있습니다. 아참, 친구의 이름은 마지막으로 명함을 만들었던 '김태주'가 본명입니다. 겨울은 두어 달이나 더 남았습니다. 나 역시 아직 남겨진 일이 있습니다. 전면을 다 맞출 수 없어 분해했던 루빅스 큐브 조각을 이제 하나씩 조립해야겠습니다.

                                                        
* 『현대시학』 2004년 6월호, <인접예술과 詩 - 나의 시와 소설>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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