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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지, 시간과 공간의 역동성

2008.05.26 16:41

윤성택 조회 수:522 추천:4


* 《미네르바》2008년 여름호

무협지, 시간과 공간의 역동성

‘무협지’라는 단어를 떠올려보면 몇 가지 이미지가 겹쳐진다. 누런 갱지의 눅눅한 냄새, 페이지를 세로로 훑고 지나가는 대본소의 핏발 선 눈동자들, 방학동안 폐인이 되는 가장 빠른 지름길, 빠질 수 없는 사자성어 추풍낙엽(秋風落葉)! 그럼에도 무협지에는 묘한 중독성이 있다. 거기에는 현실에서 이뤄내지 못한 통렬한 결말이 있기 때문이다. 갈등은 일정한 패턴 속에서 일시에 해결되기도 하는데 그 내용은 폭력이 유일한 방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사람은 모방된 것에 대하여 기쁨을 느낀다고 했던가. 무협지에는 이러한 패턴이 극명하다. 권선징악은 필수이며 주인공은 절대 죽지 않는다. 일대일 대결은 피할 수 없고, 그 결과에 따라 스토리의 전복이 빠지지 않는다.
통속적일수록 그 생명력은 끈질기고 길다. 그래서 차라리 아름다운 것일까. 몇 십 년이 지나도록 무협지가 꾸준히 읽히는 이유는 폭력의 무한한 변신이 가능케 한 것은 아닌지. 그래서 무협지 속 초인(超人)의 등장은 일상의 범인(凡人)만큼이나 흔하다. 초인은 오직 맨몸으로 상식의 한계를 넘어 원하는 대로 호쾌한 무공을 펼친다. 돌이켜보면 문학의 순기능도 곤궁한 현실에서 이렇듯 정신을 구원한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나의 시에서는 어떤 초능력적 요소가 있고 또 어떤 표현들이 있었을까. 단 한 번도 무협지와 나의 시가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었지만 몇 편 시를 다시 읽고 나서 그 연결고리를 생각해본다.
  
        귀갓길, 현상수배 벽보를 보았다
        얼마나 많은 곳에 그를 알려야 하는지
        붉은 글씨로 잘못 든 내력이 적혀 있다
        어쩌다 저리 유명해진 삶을
        지켜봐달라는 것일까
        어떤 부릅뜬 눈은
        생경한 이곳의 나를 노려보기도 한다

        어쩌면 나도
        이름 석 자로 수배중이다
        납부마감일로 독촉되는 고지서로
        열 자리 숫자로 배포된 전화번호로
        포위망을 좁혀오는지 모른다

        칸 속의 얼굴은 하나 둘 붉은 동그라미로
        검거되어가는데, 나를 수배한 것들은
        어디서 잠복중일까
        
        무덤으로 연행되는 남은 날들,
        그 어딘가
        잡히지 않는 희망을
        일망타진 할 때까지
        나는 매일 은신처로 귀가하는 것이다

                - 「수배전단」

먼 거리에 존재하는 사건이나 물체를 이미지화시켜 볼 수 있는 능력이 투시이다. 경찰서를 지나칠 때 매번 보게 되는 현상수배 벽보가 두려웠던 적이 있다. 아마도 이런 투시라는 상상의 초능력이 나를 옭아맸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그 두려움이 나의 삶의 부분으로 확장되었고 시간은 “무덤으로 연행되는 남은 날들”로, 희망은 일망타진의 대상으로, 집은 은신처로 도미노처럼 드리워졌으리라.
무협지의 매력은 순간이동과 같은 시간과 공간의 역동성이다. 축지법이 고전이 되어버린 것처럼 시간은 단지 주인공이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배경일 뿐이다. 몸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훌쩍 무중력으로 떠오르기고 하고, 불길 속에서 홀연히 사라져 들판을 가로지르기도 한다. 실체며 본질인 시간에 얽매이는 우리 세상살이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협지는 일종의 출구인 셈이다.

        제 안을 스스로 비워버렸다는 듯
        창문 대신 덧대 박은 녹슨 함석을 걸어놓고
        면사무소 옆 삼각지붕으로 서 있다
        가로지른 자물쇠가 붙어 있는
        벽들은 전국 어딜 가도 같은 누런색이다
        인근 간판이 바뀌거나
        낡은 집이 헐릴지라도 시간과 무관한 듯
        한낮 창고 위 풍향계는 쉴새없이 돈다
        깜깜한 내부 섬광처럼 뚫려 있는 못구멍들,
        먼지의 환영이 내밀하게 가라앉는 그곳은
        어둠보다 깊은 버뮤다 삼각지대 같다
        사라진 빛들이 창고에서 창고로 이동하며
        앞문으로 들어선 소년이 청년이 되어 나오고
        뒷문으로 머리띠를 두른 노인이 걸어나온다
        전송되는 것은 세월뿐 아니어서
        그 많던 포대는 시간의 벽을 통과해
        몇 년 전이나 몇 년 후로 쌓여 있다
        ‘결사’라는 붉고 서늘한 벽화를 보며
        나는 죽음까지 관통하는 미래를 보는 것만 같아
        다시는 열릴 것 같지 않은 자물쇠 너머
        한사코 그 안을 들여다본 것인데
        터널 같은 그늘에서 쩍쩍 금이 뻗는다

                - 「농협창고」

도시도 아니고 농촌도 아닌 그 중간쯤 변두리에 농협창고는 항상 그대로이다. 함부로 헐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새롭게 단장되지도 않는다. 만일 농협창고가 헐리기라도 한다면 그곳의 위치는 이제 중간지대가 아니라 도시로 빨려든 것이다. 전국 어딜 가도 똑같이 생긴 이 농협창고를 한때 텔레포트 게이트라고 엉뚱한 공상을 한 적이 있다. 농협창고 안에서 은밀한 빛이 뿜어져 나오며 허공이 열리고 과거나 미래에서 온 이들이 나타날 거라는 상상. 그러나 농협창고의 현실은 벽의 붉은 락카가 말해주듯 핍진한 농촌의 상징인 동시에 무관심의 이정표였다. 판타지나 무협지의 상상이 가볍게 둥둥 떠오르다 현실이라는 추의 무게로 땅에 이끌린다고 할까. “깜깜한 내부 섬광처럼 뚫려 있는 못구멍들,/ 먼지의 환영이 내밀하게 가라앉는 그곳”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을 나눠서 소유하고픈 갈망이 만들어낸 공간이었던 것 같다.
문학과 상상력, 더 나아가 문학과 공상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 이러한 감응은 인간을 절대적 시간의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실현될 가망이 없는 막연함이 모두 실재해 일어나고, 그렇게 또 하나의 세계로 우리와 공존한다. 그러므로 무협지를 가장 문학적으로 바라보는 방법은 이야기나 구조가 아닌, 무협지가 제시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때로 상식을 반박하고 상상에 오감을 집중해보자. 그 연상 작용에서 미지의 환유가 내려온다. 세계는 나의 한 양상일 뿐이며 우주의 블랙홀과 같은 시간의 왜곡이다. 문학적 상상력이란 이렇게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질 수 있는 능력의 간절함에서 비롯된 것이니까.


* 윤성택 200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리트머스』(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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