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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의 죽음

2003.11.20 12:05

윤성택 조회 수:571 추천:2



1.
친애하는 친구에게
이 서신을 받을 즘이면 나는 서울을 떠나
남해를 찾아 다시 한번 떠났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아마 돌아오지 못하는 길로 갔을 것입니다.
아, 이 땅의 자네들이 그립겠지요.
아직 누릴 수 있는 젊음을 만끽하며 이 세상을 누려 보시게.
나, 먼저 가네. 친구들이여, 잘 있게.
2002년 8.15 강월도

2.
시인이자 극작가, 철학자로 활동한 강월도(본명 강욱·66)씨가 최근 부산에서 제주로 가는 페리 선상에서 바다로 투신,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다.
강씨는 지난달 21일 페리 선상에서 투신했으며 이를 목격한 승객이 해경에 신고해 인근 해역을 수색했으나 찾지 못했다고 친지들은 전했다. 선상에 남겨진 그의 가방 안에서는 짧은 유서와 함께 중절모를 쓴 신사가 가슴까지 바다에 잠겨 있는 합성 사진이 발견됐다.
그는 경기중·고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문리대 사회학과 재학 중 미국 유학을 떠났으며 컬럼비아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30여년간 살면서 강의와 소극장 운동 등을 펼치다 87년 귀국한 그는 한성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시집 ‘사랑무한’과 철학논문집 등 20여권의 저서를 남겼고 ‘어쩐지 돌연변이’ 등 희곡을 쓰기도 했다.
강씨의 희곡 ‘뻔데기전’을 무대에 올렸던 윤호진씨(극단 에이콤 대표)는 “강씨는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빛을 보지 못한 불운한 천재였다”고 말했다.
■ 동아일보   2002년 9월 4일 김갑식기자 gskim@donga.com

3.
지난 8월 21일 부산에서 제주로 가는 페리 선상에서 바다 에 투신, 실종된 강월도씨의 시신이 동해에서 발견됐다.
10월 13일 울릉도 근해에서 해경경비정이 시신 일부를 찾았는데, 그 옷에 강씨의 주민등록증과 명함이 들어있었다. 해경은 “투신한 뒤 발 생한 태풍으로 인해 시신이 해류를 타고 동쪽으로 밀려갔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 동아일보   2002-10-17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

4.
두 달 동안
해저 깊은 곳까지 가라앉았던
그의 몸은 어땠을까.
해류를 따라
수중 속 무거운 육신을 유영하며
더 깊은 바다 밑 소리에 귀기울이며.
이제 여한이 없는 그 막막한 휴식.
나는 목하 생각 중이다.

한 시인이 죽음 저편으로 떠나는 여행에서
이제 돌려보내온,
두 달이 지나 발견된 명함이 붙어 있는 육신,
마지막 편지.


*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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