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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2003.12.11 10:07

윤성택 조회 수:847 추천:18



편지



  편지가 아름다웠던 시절, 멀리 있는 사람에게 편지만큼 안부를 묻기 편리한 도구도 없었을 것이다. 특히 은근하면서도 뜨거운 마음을 전달하고자 하는 이에게는 매우 매력적인 매개였다. 그래서 그 시절에 주고받았던 편지는 깊은 함에 보관되어 가끔씩 잊혀질 듯한 추억을 되살려내기도 했을 것이다. 이렇게 편지는 마음의 소통수단이 되어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그러나 핸드폰과 전자우편의 시대에 편지의 자리는 어디일까. 더 이상 손수 편지지에 써가며 안부를 전할 필요는 없게 되었을까? 편지는 이제 누구에나 필요한 통신수단의 자리에서 물러나 쓸쓸하게 잊혀지는 것만 같아 아쉽기만 하다.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올곧은 마음의 줄을 따라 또박또박 글자들을 채워내며 따뜻한 말의 풍경을 그려내고 싶다. 밤새 썼다가 아침이면 다시 쓰기도 했던 나날들, 우리는 그 감성과 그리움의 시간을 거쳐 여기까지 떠나왔을 것이다. 우체통은 그렇게 뜨거운 생각을 닮아 붉은 색이 되었다. 그래서  우체통은 따뜻한 활자들이 담겼을 때 가장 아름답다.

  그러나 요즘 배달되는 편지에는 딱딱한 인쇄체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주민번호와 계좌번호 혹은 전화번호로 포위망 좁혀 오는 청구서들이 편지함의 텃새가 되어 며칠이 지나도 떠나지 않는다. 이메일 또한 어떠한가. 보내는 즉시 받고 또 수신확인이 이뤄져 사나흘 발효되는 그리움이 끼여들 틈이 없다. 또한 핸드폰은 우리를 너무 수다스럽게 만들고 종종 설익은 고백으로 서로의 상처가 되기도 한다.

  한때 편지는 우표에 찍힌 물결무늬 소인을 따라 세상 어디든 흘러갈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포크송 책자 뒤편 펜팔란의 낯모를 이에게 무모하지만 쓸쓸한 마음을 또박또박 전하기도 했던 것 같다. 살아가면서 누구든 낯모를 이의 정성스런 편지를 받아본다면 그 읽는 순간만큼은 온전히 그 마음을 지켜보는 배려가 생긴다. 그런 기다림의 끝에서 답장이라도 온다면 병에 담긴 편지가 망망대해를 지나 어느 섬에 도착한 것이리라. 그 수많은 여정을 거쳐온 편지가 우편함에 두근두근 담겨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그 여운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면 편지를 써볼 일이다. 보고 싶다는 막연한 감정을 활자로 인화해내는 그 작업이야말로 사랑에 대한 자기검열이기 때문이다. 한 글자씩 내려가면서 스스로 사랑에 대해 약속하고 또 다짐한다. 그렇게 몇 번이고 다듬어진 감정을 편지지에 옮기고 나면, 어느덧 우체통 앞에 서 있게 된다. 우체통은 편지를 들고 심호흡을 하는 이에게 마지막이라고 붉은 색으로 묻는다. 이 때 물음은 사나흘 후에도 변치 않은 마음일 것이냐는 경고일 것이다. 이렇게 주고받는 편지는 물결무늬 소인을 따라 서로에게 천천히 흘러들어 결국에는 여운 깊은 사랑으로 합쳐지는 것이다.

  우리는 편지와 함께 뜨거워본 적이 너무 오래되었다. 편리한 미디어에 일상을 전송하며 쉽게 손전화를 하고 또 쉽게 이메일을 보내며 살았다. 그동안 우체통을 길모퉁이에 쓸쓸하게 방치시켜왔던 것이다. 그래서 우체통은 건널목이나 골목길 모퉁이를 어슬렁거리는 비만하지만 텅 빈 부랑자가 되었다. 그러다 어쩌다 누군가 우체통에 손을 밀어 넣는 순간, 우체통은 그만 제 쓸쓸함의 무게를 텅텅 눈물겹게 들려주었을 것이다. 그런 밤마다 제 안 편지를 보듬고 별빛을 바라보며 가야할 먼먼 여정을 가늠했을 우체통. 우리는 함부로 이곳을 지나치며 늙어왔다.

  돌이켜보면 편지와 우체국에 관한 편린들이 많다. 이문재 시인은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산책시편≫/ 민음사)라고 말했고, 안도현 시인은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 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바닷가 우체국≫/문학동네)라며 그리움을 담았다. 또한 우편배달부 마리오는 "내가 그 나이였을 때 시가 날 찾아왔다/ 난 그게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그게 겨울이었는지 강가였는지/ 언제, 어떻게인지 난 모른다"(영화 ≪일포스티노≫)며 마지막 자막에 이 편지를 남겼다. 널리 회자되고 있는 이수익 시인의 시에도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우울한 샹송≫/나남출판)라며 편지를 쓰는 마음은 기다리는 마음이자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윤도현 밴드의 노래에도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우연한 생각에 빠져/ 날 저물도록 몰랐네"(≪가을우체국 앞에서≫/1집)라고 우체국에서의 기다림과 소통을 아름답게 노래해냈다.
  그리운 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이 마음, 붉은 우체통을 통해 어느 하늘 아래 있을 당신에게 배달되고 싶다.


  - 하늘은 푹 눌러쓴 모자 마냥 어둑한 표정이네요. 누군가 젖은 발로 찾아올 것 같은 날입니다. 기지개 한번 하자 툭툭 터지는 실밥처럼 겨울비가 내립니다. 유리창의 빗방울들은 멈췄다가 흘렀다가, 다시 흘렀다가 멈췄다가 비의 결을 따라 오후의 무게로 내려앉고요. 지금 따뜻한 차 한 잔, 푸르르 날아 갈 것 같아 두 손에 꼭 쥐고 있습니다. 이런 날은 그립다던가 보고싶다던가 종일 상영되는 빗속 추억을 관람하기 좋습니다. 빗소리를 따라 나갔다가 와인 한 병 사올까 합니다. 이 비는 아무래도 그때까지 기다려줄 것 같습니다. 당신이 들렀다가 간 사이 나는 많이 착해졌습니다.


* 월간 『오뜨』2003년 12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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