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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용제 - 죽음을 변주하는 치열함

2001.04.07 11:07

윤성택 조회 수:327 추천:5




죽음을 변주하는 치열함



―『삼류극장에서의 한때』를 중심으로


                                                                                                  윤성택



배용제 시인의 이름을 신춘문예 최종심에서 발견하기 시작한 때는 95년도 정도부터였던 것 같다. 97년 동아일보에 당선되기 전, 한 해에 중앙지 신춘문예 최종심에 2-3곳은 올랐던 그였다. 대체 어떤 시를 썼기에 그의 시가 번번이 복권당첨과도 같은 신춘문예 최종심에 올랐던 것일까 적잖이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오랜 시간을 견디었기 때문일까. 나는 그의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소감에 드러냈던 속내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그는 놀랍게도 기존의 아부성 당선소감과는 달리, 문단권력에 의한 문학 등용의 병폐를 은유적으로 꼬집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대체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문학의 삶에 왜 필요한 건지 모르겠다. 책임져야 할 세월과 짓누를 무게속에서 내 안의 어떤 것들이 문학의 모습으로 드러날 때, 과연 이것이 무슨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문학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갈 내 길이 어떻게 달라질 건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것이다.」
― 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소감 中  


그리고 시간이 흘러 97년 12월 그의 시집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수원 남문 근처 서점에 가서 그 시집을 주문을 했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의 예순여섯 편의 두툼한 시들을 펼쳐 읽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길고 권태로운 그의 시편에서 피어오르는 달콤한 죽음의 향기를 맡았기 때문이었다. "죽음"이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오래 전부터 잔류되어온 화두이기에 그의 시는 오히려 친근감까지 들었다. 또한 生은 지리멸렬하고 세상은 더욱 혼탁하게만 여겼던 그 당시 나의 관념에서도 치명적인 울림이었다.


지루하고 평이로운,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길. 자유란 소멸이나 파멸의 세계에 있다고 깨달은 무의식의 이정표를 따라가는 것은 아닌지……고통과 지독한 경험과 공포에 대해. 그것이 바로 존재의 본질이고 그것들을 껴안는 행위가 사랑이라고.
― 『삼류극장에서의 한때』自序 中


이런 고의적으로 권태롭기까지한 그의 시에서 가장 도드라진 풍경들은 "죽음", "꿈", "누수", "속도", "늙음"에 대한 단상斷想들이다.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하나의 시집을 형성하고 있으며, 붉은 속지의 시집은 또 하나의 강렬한 상징이 되었다.


잠시 후 검시관이 다가와 사망진단서를 발부하자
그제서야 알아차린 듯 두 눈을 감는다
아주 조용한 곳으로 그가 옮겨진다
텅 빈 바깥으로 줄이 쳐지고 팻말이 걸린다
여기는 출입금지구역입니다.
― 「출입금지구역」 15쪽

내 몸 안에서 무언가 끝없이 전송된다.
호흡이, 시선이, 소리가, 체온이, 청춘이, 눈물이, 생각이, 생각 속 상상이 전송되고, (……)
흑백의 내 생이 천천히 두꺼운 무덤을 향해 전송되고 있다.
―「나는 날마다 전송된다」 36쪽

숲은 썩어 무덤을 껴안고
무덤은 다시 숲에게 수혈하는
오, 이 건강한 죽음들.
― 「떡갈나무 숲으로 가다」 51쪽

내 껌벅이는 눈동자를 흔들어보는 희멀건한 불빛. 엉성한 내 움직임의 최후를 지켜보기 위해 그림자를 이리저리 치운다.
― 「지하 생활자의 일기」 82쪽

최후의 순간까지 그를 찾는 전파를 보낸다
뚜, 뚜, 뚜…….
이제 육체의 소용 가치는 그것뿐이다.
― 「식물, 혹은 인간에 대한 관찰」 85쪽

세월의 낙인이 찍혀버린 저 거무튀튀한 마른 버짐들
어디선가 호명할 때마다 영혼은
명령을 듣지 않는 누추한 육체의 집을 떠나리란 사실을
그들은 웅크린 채 익히고
― 「공원의 노인들」 129쪽


삶은 어차피 죽음으로 완결된다. 시에 있어서 죽음은 근래에 이뤄진 주제가 아니라 오래 전부터 불리워졌던 노래이다. 어쩌면 미래가 시에 개입하는 방식이 바로 "죽음"의 시편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배용제의 시에서는 죽음은 의식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죽음의 근원적인 해체 뒤 미학적 재구성이 뒤따라, 수많은 이미지들을 관념의 화학작용으로 변주해낸다. 평론가 이광호는 그의 죽음에 대한 인식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 시대에 저 음험하고 집요한 자본주의적 합리성과 대결하는 시는 이렇게 죽음의 현대성이라는 주제와 만날 수밖에 없다. 죽음의 현대성만이 자본의 신화가 건설한 세계의 뒷면을 미리 엿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꿈은 "내 꿈의 성능은 엉망이어서/ 변질된 모습을 드러낼 때가 더 많"(「나는 날마다 전송된다」)으며 "꿈보다 더 아득히 존재하는 꿈"(「몽유병자들의 천국」)이다. 그리하여 그의 꿈은 온통 공포의 장소로 탈바꿈된다. "일그러진 표정을 가진 기억에 꿈은/ 축축한 땀을 쏟으며 한없이 어두워"지고 "꿈은 모두 악취로 가득하"(「꿈은 또 하나의 쓰레기 봉투이다」)여 꿈 자체가 부패한다고 진언한다. 뿐만 아니라 그 괴기한 공포의 형상은 "온몸에 환상의 바늘이 꽂"(「나는 미친 꿈을 꾼다 1」)히는 장소인 동시에 "다시는 잠 밖으로 나오지 않"(「거지의 잠」)는 공간인 것이다.
그의 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현실과 꿈이 이완된 누수漏水로 공포의 체험을 구가謳歌한다. "쉬지 않고 떨어지는 세면대의 저 물방울 소리,/ 한밤중에도 나는 그만큼 열려"(「잠글 수 없는 무게」)있으며 "얇은 꿈에 구멍이 나고 나는 문 앞에 돌아와" 섰을 때 "곪아터진 뜨겁고 끈적한 진물이 주루룩"(「꿈은 또 하나의 쓰레기 봉투이다」)흐르고 만다. 급기야 "몸 밖으로 증발되는 무수한 물기, 꿈의 증거를 말리"(「나는 날마다 전송된다」)기까지 한다.
이러한 배용제의 공포감은 참을 수 없는 속도로 분출된다. "죽음의 바탕 위를 끝없이 지나가는 것들,/ 빠른 속도를 앞세운 시뻘건 눈들"(「일번국도, 흘러가는 것에 대하여」)이 되었다가, "종착역에 도착해도 끊임없이 솟아나는 힘"으로 "속력이 안으로 몰아치"(「기차는 핸들이 없다」)기도 한다. 그리하여 "나는 속도와 더불어 소멸하고 싶다"(「폭주, 바람의 세포」)라는 발언과 "속도의 극점을 느"껴 "완벽한 파멸을 원"(「폭주, 그 황홀한 파멸」)하고야 만다.
그는 또한 인간 수명의 끝에 매달려 속도를 잃은 노인에 대한 많은 단상들을 제공하면서, 늙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건조하게 조명한다. "건조기의 땅처럼 쭈글쭈글한 젖가슴이 드러"나 "더 이상 꺼낼 내용물이 없는 부대"(「옛우물 옆,」)이거나 "몸은 갈수록 무거워"지고 "공기의 통로마저 좁아져/ 가느다란 숨을 뽑아내느라 안간힘을"(「치매」)쓰는 존재이다. 그 뿐인가. 노인의 몸은 이제 "훌륭한 지팡이였던 뭉툭한 뼈,/ 통증을 매달고 퇴화하는 그"(「박씨의 주파수」)인 동시에 "짙은 주름을 가지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많은 곳을 떠돌아다녀야 했는지"모르는 대상이 된다. 결국 영혼과 몸이 합일되지 못해 "어느 날 갑자기 말을 듣지 않는 몸의 왼쪽을 끌"(「어떤 중심이동에 대하여」)며, "남은 시력을 자신의 영역 안으로 감추"(「천변川邊을 걷는 노인」)기도 하는 것이다.


요즘 시인들은 기형도에게 조금씩 빚지고 있다는 말을 상기해본다. 그러나 나는 "시인들은 여전히 폐허에서 중얼거리고 있다. 물론 그랬다. 거기 기형도가 있었고, 기형도 이후, 혹은 기형도 이전, 많은 시인들이 소멸의 이미지 속에서 시를 살았다."(「죽음을 닮은 生」평론)의 이광호의 말에 공감한다. 나는 배용제의 시가 기형도의 죽음 너머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섣부르게도 배용제의 시가 기형도 시의 완성을 모색했다고 믿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죽음의 예감 너머 죽음을 직시한다는 인상과, 죽음인 삶을 견뎌나갈 수 있는 방향을 점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배용제의 시를 전적으로 추앙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한계성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장점인 죽음에 대한 지나친 접근으로 인한 다양성 부족과, 죽음의 향일된 자세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삼류극장에서의 한때』 시집(1997) 이후 배용제는 어떻게 스스로의 길을 모색했을까. 그의 신작시 6편을 읽는다. 2000년 문학과 사회 여름호 「꿈의 잠언」 외 3편과 시안 1998년 겨울호 「나는 눈물이다」,  1998 문학사상 「버려진 의자」, 현대문학 1998년 6월호 「달팽이들」은 시집 이후 그가 썼던 시들이다.
이들의 시에서 우선 그는 소재의 다양성을 추구한 듯 보인다. 기존의 시집에서는 현실 속에 몸담은 자아가 겪는 부정적 면모, 죽음 등에서 풍부한 통찰을 불러일으켰다면 신작시에서는 개미, 테크노 댄스, 눈물, 버려진 의자, 달팽이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소재를 소묘해낸다. 시집에서 보였던 공포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음울한 자의식은 한풀 걷어낸 양태이다. 이는 그의 시가 상상력의 고갈의 문제에 봉착하지 않았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개미가 기어간다. 온 거실 안, 내 식욕의 흔적과 체온과 일상을 넘어간다. 내 생의 길을 쫓아 강을 건넌다. 들판을 지나고 개마고원을 넘는다. 사막을 횡단한다. 길의 자취가 사라진다. 허둥대며 길을 잃기도 하지만 여전히 개미는 모래 언덕을 넘어서 간다. 길 줄밖에 모르는 개미. 빵 부스러기 하나를 메고 마른 모래 바탕을 더듬거리며 지금쯤 어디를 기어.
― 「개미」 中

왼쪽 오른쪽 쉬지 않고 움직인다, 정지한다
다시 움직인다 다시 정지하다가 움직이다가 다시
삭제되다가 실행되다가 다시 삭제되다가 실행되,
저 끝내 허물어지지 않는 움직임
저 질서정연하고 격렬하고 단순한.
― 「테크노 댄스」中

희고 투명한, 아른거림으로 비치는 눈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눈물
그러나 그때 나는 허공을 굽이쳐 흘러가는 꿈,
가장 가벼운 무엇의 일부가 되는
그날까지 나는 그저 눈물이다
― 「나는 눈물이다」中

모든 내용물이 앙상한 뼈대를 벗어나자
짓눌렀던 무게들도 사라졌다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바람이 쉬었다 가고,
햇볕에 잠시 어깨를 기대고,
검은 그림자도 웅크렸단 가고,
가장 가벼운 것들의 일부가 된다
― 「버려진 의자」中

세상이 너무 눈부시다
그늘 밑 달팽이들,
속살의 여린 꿈틀임을 웅크린 채
딱딱한 집에서 한 발짝도 이동하지 않는다
지하도 모퉁이마다 그들의 무리가 서식한다
― 「달팽이」中


그럼에도 배용제의 가능성을 믿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의 특이한 시의 발성법에 있다고 본다. 나는 특히 「꿈의 잠언」의 신화와 상징의 세계를 탐사하고 깨인 눈으로 역사와 시대를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에 놀란다. 존재에 대한 복잡다단한 생각들을 관념의 언어로 싱싱하게 길어 올린 것이다. 기형도는 詩作 메모에서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믿는다"라고 말했지만, 배용제의 잠언은 관념과 환각 속에 존재한다. 이는 그의 시가 그로테스크한 사유의 시편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는 단연코 「꿈의 잠언」과 같은 시가 배용제 시인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배용제의 잠언이 우주까지 질료로 삼아 긴밀한 상상력으로 엮어지길 조심스럽게 지켜볼 것이다.


꿈의 잠언 [전문]


1
세월이 너무 태연하게 늙어간다. 고정된 것들 모두 얼어붙는다. 한때의 애인은 컴컴한 지하실 문을 두드리고 사납게 펄럭이던 지상의 그늘들은 겨울 수용소로 압송당했다. 알몸의 나무가 바람의 춤을 익힐 때에도 진리의 서적들은 여전히 혐오스러운 가면을 쓰고 돌아다닌다. 관념의 시절이다. 아무것도 슬프지 않다.

2
부드럽고 천한 여자의 가슴을 그리워한다. 쾌락은 얼마나 정성스레 나를 양육할 것인가. 내 혀는 얼마나 자랑스럽게 욕망의 젖꼭지를 빨며 말을 익힐 것인가. 수치심으로 가득 찬 여자들의 정신을 배우고 싶다.

나는 부패함으로 살찌워진다. 정신의 텃밭에서 썩은 씨앗들이 재배된다. 내 살점들, 아프지 않다.

겨울이 오면, 나는 하얗게 탈색된 세상을 체험하며 온갖 환멸들을 습작한다. 그런 경이로운 시간이 내게 있음을 찬송한다. 헛것의 창작물들이 내 일생을 대표할 것이다. 먼 날, 유물이 진열될 때마다 칭송되는 신으로 군림할 것이다.

나는 쾌락의 아들― 오, 여자들아. 검은 구멍을 열어다오. 내 모든 감각들은 은밀한 숲과 험악한 늪에서 죽음의 꿈이 생성되어가는 과정을 맛보고 싶어한다. 나는 애무의 고통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다.

3
얼음의 나라에는 얼음의 군주가 있고, 얼음의 백성이 있고, 얼음의 길이 있고, 얼음의 자동차가 있고, 얼음의 계절이 있고, 얼음의 산이 있고, 얼음의 숲이 있고, 얼음의 나무가 있고, 얼음의 꽃이 있고, 얼음의 석양이 있고, 얼음의 집이 있고, 얼음의 아이가 있고, 얼음의 노인이 있고, 얼음의 시계가 있고, 얼음의 램프가 있고, 얼음의 하수구가 있고, 얼음의 계단이 있고, 얼음의 창이 있고, 얼음의 눈물이 있고, 얼음의 노래가 있고, 얼음의 춤이 있고, 얼음의 기억이 있고, 얼음의 꿈이 있나니,
그러니 어떤 꿈이 흘러다니겠는가.
어떤 희망이 범람하겠는가.

4
내 정신은 끊임없이 환각 속으로 진화한다.

5
모든 꽃들은 열매를 맺으며 썩어버린다. 다행한 일이다. 살아 있는 것들에게 고정할 수 있는 건 권태뿐이다. 다시 늙은 자들이 두려워하는 저녁이 왔다. 잎의 그늘이 사라진 허공으로 거대한 구름들이 몰려온다. 얼어붙은 별들을 향해 짐승들이 날아간다. 단아하고 선명한 달빛은 언제나 배후에서만 반짝인다. 한 번 사용한 계절은 돌아가 지옥의 방이 된다. 겨울의 밤은 환기구가 없다. 저 태연한 세월.

시계는 늘 무뚝뚝한 변호를 하고 나는 도덕과 가치로부터 제명당했다. 탄생의 죄악을 감당할 어떤 정신이 있을까? 몸은 한 방울의 물이 되기 위해 영혼의 능욕을 견뎌내지만 내 쾌락은 고귀하고 당당하다. 이제 나는 모든 증오를 절제한다. 고요하고 불길한 새벽에 이르기 위해.

단언하건대, 나는 부패한 집이고 몽상이고 노래다. 나는 동요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