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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팔달문에서 [수필]

2001.04.16 12:46

윤성택 조회 수:292 추천:4


          수원 팔달문에서
                                
                


팔달문, 이제는 아무도 그 곳 열린 문을 통과하지 않는다. 너비 3.56m, 높이3.17m를 그나마 통과하는 것은 거침없이 흐르는 자동차 소음과 끈적끈적한 공기들 뿐.
모두들 돌아서 가는데 익숙한 탓일까. 수원의 번화가에 팔달문은 이제 둥그런 길목의 이정표가 되어 버렸다. 팔달문을 관통하는 것이 아니라 둥근 성문을 끼고 돌아야만 오산이고 서울에 갈 수 있다. 길들은 아스팔트에 노란 긴 줄을 새기며 떠나지만 어딘가에 멈춰서 땅으로 주저앉으리란 것을 알고 있기나 한 듯 팔달문은 둥그렇게 땅을 끌어 모아 서 있는 형상이다.

나는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의 경계에서 안내 표지판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이 문은 화성의 남문으로서 정조 18년(1794) 화성 축성과 함께 건립되었다.'
왼쪽 팔달문에 키를 맞추며 KFC, 피자헛 빨간 입간판 아래 영화상영 그림 간판이 보인다. 총을 든 남자의 머리는 갈색이다. 일주일 남짓의 상영기간 동안 팔달문을 호위하려는 듯 부릅뜬 눈이 건너다보고 있다. 이러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이 백 년 전 정조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 문은 석축 홍예 위에 중층의 우진각 지붕으로 된 문루가 있고, 문루 주위에는 여장을 둘러 쌓았으며 전면에는 반원형의 옹벽을 쌓고 좌우에는 적대를 두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 환한 대낮, 차들의 행렬로 접근하기 어려운 팔달문으로 뛰어간다. 2차선 도로를 건너며 차들의 행렬이 거친 물살같다. 경적 소리를 뒤로하고 간신히 그곳에 도착한다. 그 곳에 갈 수 있게 하는 횡단보도는 어디에도 없다. 마치 사거리의 고립된 상징물처럼 묵묵히 서있을 뿐이다. 언젠가 수원 영업용 택시 면허 시험에서 서울의 남대문보다 조금 크다는 문제에 갸우뚱했다는 택시기사의 관심처럼 팔달문은 그냥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팔달문을 돌아보며 휘갈겨 적은 메모를 읽는다.


이렇게 가까이 들어와 본적이 없다.
나는 입구에 들어서며 주춤거린다.
도심의 가운데 서 있는 성문은
오래되고 낡아 죽은 자들의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옹벽의 한 면이
햇빛에 들킨 그림자를
문 옆에다 쓰러뜨리고 있었고,
담쟁이의 더듬이가 슬금슬금
성벽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축조되어 살아온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을까.
나를 구경하고 있는
이끼 낀 돌덩이들,
그러나 과거를 되살리기에는
군데군데 시멘트의 흔적이 견고하다.
언젠가 이 城도 전설이 되어 영영
사진 속으로 들어갈지 모른다.


문의 형태는 마치 원을 통과하는 직선처럼 외형을 이루고 있었다. 안쪽 입구 옆으로 잔디가 깔려 있어 감청색 석벽과 강렬한 색 대비를 이뤄 한 눈에 들어왔다. 다만 한 가운데 쯤 조명등이 문 위 지붕을 올려다보며 녹슬어 있는 것이 어색하게 들켜버린 문명으로 보여졌다.
그러나 전생을 되짚어 사는 것처럼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다는 듯 팔달문은 붉으스레한 철문을 열어 놓은 채 나를 통과시켰다.
'문의 규모는 홍예 높이 3.17m, 너비 3.56m에 두께 6.4m이며 문루 정면이 9m(3칸), 측면이 3.6m(2칸)이다. 이 문은 다행히 6.25동란 때도 별로 큰 전화를 입지 않아 비교적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나무의 결이나 윤곽이 약간 색 바랬을 뿐 외관은 오랜 세월을 견뎌온 흔적이 역력했다. 저 밖에서는 모두들 바쁘게 흘러가는데 이 곳 안의 시간은 정지되어 있었다. 마치 더이상 작동하지 않는 기계의 부속처럼 고스란히 유물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문'이라는 기능을 상실했다고 느꼈을 때 그 시간을 기념하기 위해 관광 안내 표지판을 세웠을 것이다.

문을 지나면서 뒤돌아보니 팔달문 맨 꼭대기 지붕에 홀씨가 어디서 날라와 자리를 잡았는지 제법 키 큰 풀 포기가 보였다. 그 높은 곳에 뿌리내릴 흙이라도 있었을까. 좀더 눈을 가늘게 초점을 맞추니 그 풀 포기 옆에 피뢰침이 같은 키로 서 있었다. 그래도 도시를 무덤으로 만들며 붉은 네온 십자가 위에 피뢰침을 올려놓는 신앙들보다는 훨씬 믿음직스러웠다. 그 너머 은빛 비행기가 서서히 하늘을 긁어가고 있었다.

눈을 감으면 그들이 올 것 같다. 짚신에 나귀나 수레를 이끌고 뿌연 먼지 일으키며 서울로 상경하는 무리들, 그들이 다시 돌아온다면 금방이라도 팔달문은 넉넉한 가슴으로 받아들일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