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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하림 [속이 깊은 심연으로] 시집 읽기

2001.04.26 16:35

윤성택 조회 수:259 추천:3

  

속이 깊은 심연으로/ 최하림


          

                                                

        머리카락 같은 감정을 흐트러놓는,
        원고지와 잉크병 빛나는 눈을 뜨고
        주위를 노려보는, 아무도 그 방에는
        들락거리지 않았지 밖에서는
        몇 번이고 땅이 얼었다 풀리고
        그사이 나는 독방에 누워서 세모래들이
        황금빛으로 사구를 흘러내리고 또
        흘러내리는 꿈을 꾸었지
                                        -<방> 중간부분 75쪽


최하림의 섬세함을 느끼게 하는 시는 75쪽 「방」에서 느낄 수 있었다.
언제나 현실은 끊임없이 우리를 상상력으로 몰아붙인다. 그리고 또한 그것이 암흑이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이미 암흑을 포기한 상태가 되곤 한다.
최하림의 시에서 광주에 관한 편린은 그에게 지울 수 없는 고통의 순간이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내가 국민학교 3학년쯤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렀다. 묻고 싶다. 과연 광주는 세월이 치유할 수 없는 돌림병인가.
그러나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6.25가 일어난 후 그 체험 세대에게는 그 역사적 고통이야말로 1950-60년 문학의 중심에 서게 만든다. 그리고 전후세대가 남겨졌다. 그 세대는 더이상 6.25를 문학의 대상으로 끌어들이기에 벽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체험적 상상력에서의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 나는 광주를 이해한다. 그러나 용서할 수 없다. 지금 거리에 뛰쳐나가 거리의 많은 젊은 피를 가진 사람에게 물어보자. 광주와 6.25를…, 시대는 흘러가는 것을 원칙으로 삼지만, 그 원칙을 빗겨갈 수도 있지만 늘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눈부시고 눈부신 꽃
        살가죽이 터지고
        창자가 기어나오고
        신음 소리도 죽은
        자정과도 같은,
        침묵의 검은 줄기가
        가슴을 휩쓸면서
        발끝에서 심장으로
        오오 정수리로……
                        - <죽은 자들이여, 너희는 어디있는가> 끝부분 34쪽


'죽은 자들이여, 너희는 어디 있는가' 끝부분 (34쪽)에서 나는 그 광주 고통의 순간을 사진집이나 잡지 등등 몇몇 간접체험으로 오버랩되어 바라볼 수 있었다. 그 고통의 모습을 아직도 시로써 강렬하게 드러낸다면 그것은 과거지향적 시세계를 견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말은 지옥이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최하림, 그 공포의 대상에서 비끌어매어 토로되는 시들… 어쩌면 최하림은 그러한 고통의 순간순간을 적고 싶었을 것이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 아닌 지옥이 존재의 집이 되어버린 슬픈 시어여!
'시'라는 제목의 시에서(77쪽) 그가 어떻게 시를 이해하는가를 생각하면 좀더 숙연하지 못했던 나에게 깊은 반성을 가지게 한다.


        서릿발같이 차가운 세계여 나는 이제 네 앞에 서서 얼굴을 비춰보고 싶지         
        않다 나는 아름다움과 선함의 본질을 보고 싶지 않다 그것들은 모두 구겨        
        지고 짓이겨지고 뒤죽박죽이 되어 시간 속에서 시간꽃이 된다

                                                        - <시> 중간부분 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