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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김선우


          


최근에 읽은 시집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집을 꼽으라면 단연 김선우의 시집이다. 김선우의 시들은 낯설고도 행복한 감상에 젖게 했다. 예전에 누가 김선우 시를 얘기하면 나는 "그 어머니 타령?"이라고 폄하했었다. 그때의 그 말들은 제대로 숙독하지 못했던 시기였음을 인정한다.
내가 놀란 것은 김선우의 관능과 자궁이라는 이미지에 연결된 육화肉化의 자세이다. 여성의 육체를 이토록 치열하게 시에 접목시킨 이도 그리 없을 것이다. 물론 최영미나 신현림 등을 차치하더라도 김언희(트렁크/ 세계사)정도가 떠오르긴 하지만, 김선우는 거기에다가 토속적인 시어와 그로테스크한 이미지까지 두루 섭렵한 노련한 시풍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한다.
나는 김선우 시집 뒤편의 김춘식의 해설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관능적인 "로맨스"의 부분을 나름대로 거론하고 싶다.

                                
        그녀의 입술이 내 가슴에 닿았을 때
        알 수 있었다, 흔적
        휘파람처럼 상처가 벌어지며
        그녀가 나의 세계로 걸어들어왔다

                - 술잔, 바람의 말, 40쪽


이 시는 전형적인 사랑의 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이 너무 쉽게 드러나는 점을 방지하기 위해 김선우는 성性의 역할을 "그"와 "그녀"를 슬쩍 바꿔 놓은 듯 하다. 로맨스에 관한 모든 시들은 모두 "그"를 "그녀"로 바꿔 읽어보면, 여성성과 맞물린 울림이 전해져 옴을 느낄 수 있다. "술잔, 바람의 말"에서 이런 로맨스는 "달빛"속의 "춤"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러한 소통은 어찌된 일인지 다음날 "그녀(그)"는 "그(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 왜 그랬을까? 간명하게 그 답이 다음 행에 이어져 나온다. "희망을 갖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약점인지 아느냐?" 결국 그 소통은 상처만 남고 제목대로 술잔과 바람의 말로 끝을 맺는 하룻밤의 일이었던 것이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녀에게선 온갖 냄새가 뿜어나왔다 포마이카 옷장의 서랍 냄새, 죽은 방울새에게서 맡았던 찔레꽃 향기, 불에 덴 것처럼 이마가 뜨거웠다 여름 소나기의 먼지 냄새, 엄마 속곳 냄새…… 세포 하나하나에 심장이 들어선 것처럼 나는 떨었다

                - 산청여인숙, 42쪽


이 시 역시 호칭이 뒤바뀌기는 했지만, 놀라울 정도로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 배여 있다. 로맨스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의 느낌을 누가 이처럼 외설스럽지 않게 표현할 수 있었던가. 나는 이들에 사랑에 들키지 않도록 읽는 내내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들어오세요 당신, 광대하고도 겨자씨 같은,
        당신이 내 속으로 들어올 때나, 시시로 사나워지는 것은
        불 붙은 뼈가 물소리를 내며
        자꾸만 몸 밖으로 흘러나오려 하는 것은
        푸른 별 깎아지른 벼랑 끝에서
        당신과 내가 풀씨 하나로 버티고 있기 때문입니다

                - 점, 54쪽


이 시는 2부의 마지막 시이다. 그래서인지 로맨스의 가장 관능적인 면이 엿보인다. "불 붙은 뼈"는 분명 남성의 상징일 것이며, "물소리"는 그 행위에서 오는 촉촉한 愛液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느낌이 어떨 것일까인데, "벼랑 끝에서/ 당신과 내가 풀씨 하나로 버티고 있기 때문"으로 욕망이 통과될 때의 느낌을 절묘하게 표현해내었다.
물론 김선우의 시집에서는 훨씬 많은 다양한 형태의 "육화"의 시들이 나오므로, 지금까지 언급한 부분은 소소한 부분일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부분에 유독 눈길이 남았던 것은 봄날, 총각의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