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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순 [불쌍한 사랑기계] 시집 읽기

2001.04.30 11:21

윤성택 조회 수:332 추천:4

  

불쌍한 사랑기계/ 김혜순

        
                
                                                
                                
        하늘의 별을 오래오래 끓이면
        그 속에서 60억 인구와 셀 수 없는 버섯과
        더 셀 수 없는 고기들이 나오듯이
        지구의 밤, 이 밤의 망상을
        오래오래 끓이면
        (나는 뚜껑을 열고 끓고 있는
        내 골을 들여다본다)
                                - <궁창의 라면> 첫연 80쪽


김혜순은 말한다. '나는 시라는 장르적 특성 안에 편안히 안주한 시들은 싫다!' 그녀의 시편들을 읽어내는 데에는 상당한 집중을 필요로 한다. 그만큼 그녀는 자신만의 목소리를 지녔다. 예전에 어느 문학상 관련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심사위원조차도 김혜순의 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난해성에 대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한다.
시집의 겉장 약력란 밑에는 이런 글귀가 눈에 띈다.
'가지런한 시공간 안에서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고통스럽게 겪다 보면, 우리는 그것들이 우리들 욕망의 가시적인 물질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김혜순의 시에는 초현실적인 이미지도 많고, 또 곳곳에 번뜩이는 싯구로 시적 질서를 기초를 보여주기도 한다.

                                
        두 귀를 간지럽히던 우리 물 속 길이 조각조각 흩어져
        내 몸 속으로 또 내가 달려와서
        마구 문을 들이받고 있나봐
        가슴속이 폐차장이 된 거 같애
        몸 속이 과속으로 늙는 것 같애
                                - <길을 주제로 한 식사 3>

        높은 소리는 여전히 거기 있었고
        해는 마당을 하얗게 납땜하고 있었다
                                - <지워지지 않는 풍경 한 장>


하나의 시집을 읽는 것은 그 시인이 마련한 상상력의 식탁에서 시인이 즐겨먹는 음식을 같이 먹는 것이 분명하다. '불쌍한 사랑 기계'를 읽고 영혼이 배고프지 않다면 좋은 식사였던 셈이다. 결국 그녀의 '불쌍한 사랑기계'는 시간과 공간을 요리하는 주방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