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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렬 [성에꽃 눈부처] 시집 읽기

2001.05.02 14:13

윤성택 조회 수:238 추천:8

  

성에꽃 눈부처/ 고형렬

        
                

고형렬은 '쓰면 망가지고 죽는다는 사실에 대한 변명'을 자신의 시쓰기라고 후기에 적어 놓았다. 그런 그의 후기는 시론 같기도 해서 인상이 깊다. 몇 가지 고형렬 시집의 특징 중 하나는 어찌된 일인지 뒷부분에 발문(해설)이 없다. 그렇다보니 기존 평론가의 고형렬 시집에 관한 선입견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이 독특하게 여겨진다. 우선 언급하고 싶은 것은 '성에꽃 눈부처'라는 제목이다. 처음 나는 이 시집을 접했을 때 시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언뜻 '성에꽃 눈부'로 읽고 말았다. '성에꽃에 눈부쳐가지고 무얼하자는 것인지 원…' 하던 나의 생각은 그만 제목의 시를 읽으면서 머리를 긁적이고 말았다. '성에→얼음꽃→물이 되어 흐른다→눈으로 된→부처다!' 아니, 제목 그 자체가 기가 막힌 시의 전부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시는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끌어들이는가에 대한 세상읽기라면 이처럼 언어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는 감각은 출중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시집을 정독한 나로서는 이 시집의 불교적 색채 때문에 무척 곤혹스러웠다. 물론 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끝없이 길고 가없이 넓은 우주 안에서 창해의 좁쌀 한 알도 안되는 이 몸이 하루살이처럼 짧은 목숨을 가지고 그래도 무엇을 하고 살아 보겠다는 것이 어찌보면 앙증하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로 가련할 지 모른다. 그러나 일찍이 김남조나 김현승 또 이해인 같은 시인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의 공통된 장점이자 단점은 종교적 제스처로 인한 부담감이었다. 나는 우주적이고 자기 성찰적 측면의 시적 상상력이 종교에 너무 기대어 발현되는 것은 보기에 썩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 한 가지 이 시집의 특징은 유난스레 '*'표시의 주를 많이 달아 놓았다는 것이다. 언뜻 세어보니 80 여 편의 시 가운데 무려 16개가 *표시를 달고 있었다. 그렇다면 앞의 시를 보자.

                                
        *고마, 네가 너의 아들을 너의 땅에 묻는구나
        한편 어디선가 평안의 소리가 들려 오는 듯하다
        죽음 다음은 우리들에게 고요할 뿐이겠지
                ……<중략>……
        그것도 검은 시신의, 발가벗은 아이들의 것을
        나는 그 곳에 섞여 묻히고 있는 나를 본다

          * 르완다의 난민촌이 있는 도시, 발가벗은 아이들의 시신은 나에게 이렇게 묵언하였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디 계세요?' 그러나 그 사체의 육친들은 이미 죽어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디 계세요> 35쪽.


위의 시를 보면 *표시의 주를 단 그 부분조차 시의 역할을 이뤄낸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렇듯 이제 요즘 시의 목소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독자에게 읽히고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해 준 셈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방법이 시쓰기에 좋기만 한 것일까? 나는 다시 생각해 보았다. 고형렬의 다른 시를 읽다보면 *표시가 단어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시 전체에 쓰여지는 경우 자칫 오해가 생길 수도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의 오해란 전체에 대한 *표시는 시에서 승화시키지 못한 찜찜함을 위로해줄 변명이 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결국 내 생각은 시에 토를 달지 않아도 이해되고 감명 주는 시인의 노력을 더 높이 평가하고 싶다
                                

        녹고 있는 거대한 얼음장이 올림픽대교에서 잠실철교 아래까지 이어졌다
         옆으로 한강물이 흐른다 수많은 오리떼들 얼음 위에 발을 올리고
        서 있다 우수의 정오 구름 햇살을 쬐고 있다 조금씩 아래로 떠내려오는
        얼음장을 보며 속으로 노래한다, 얼음 다 녹기 전 수만 마리 오리
        들 북쪽으로 날아갈 것이다 여름 어느날 성수대교 근처 우연 지나다
        그들 떠나 없음을 알 것이니 머잖아 강둑 꽃들 다시 핀대도 내 가슴속        
        엔 허전함만 흐를 것이다

                                                <우수> 전문 25쪽.


이상스럽게도 고형렬의 시들에서 유독 '그', '저', '이' 등의 표현을 많이 볼 수 있다.

                                
         안개도 어둠도 아닌 밤을 뚫고 내린천아
        내가 어떻게 너에게 다가갈 수 있겠니?       

                                   - <내린천에 띄우는 편지> 63쪽.

        피어 있는 피지 않는 숨 숨을 태양도 달도 기도도 피우지 못한다 이
        세상으로 데려오지 못한다                            

                                   - <피지 않는 꽃> 61쪽.

        나의 시는 영원한 불구의 몸을 두고 미명까지 가는 목숨의 울음을 따
        라가지 못할 것이다    
                                    -  <여치> 13쪽.

        벌도 너의 그늘을 피해가는 먼먼 한나절 흰 구름만 네 피 붉은 마음을
        읽고 떠간다                                                

                                    - <옻나무>39쪽.


이와 같은 지시어들은 시집을 펼쳐 들면 어디든지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시인은 왜 이러한 '그', '저', '이' 등의 표현을 썼을까?
「설악산 끝 봉정암(69쪽)」에서 보면 '얼마나 먼 곳인가 그곳과 이곳, 서로 얼마나 먼 곳인가.' 라고 시인은 말한다. 글자 그대로 거리감에 대한 표현이겠지만 좀더 생각해 보면 그 의미를 곱씹을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산길 94(91쪽)」 '이승이 전생만 같다 후생이며 오는 세상이 내게 꼭 실수 없이 가야만하는 본생 같다'라는 표현처럼 고형렬의 '그', '저', '이'의 습관성 출현은 시인의 불교적 인식을 통한 이승과 저승, 현생과 내세 그리고 더 나아가 환생을 구분 짓는 자리매김이 아니였을까. 그리하여 그 위치를 자주 환기시키는데 지시어들이 사용되었던 건 아니였을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