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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의섭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 시집 읽기

2001.05.08 10:27

윤성택 조회 수:338 추천:7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 윤의섭

        



                
인생이란 알고 보면 새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남이 걷던 길을 따라 걷는 것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걷는 길이 새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앞서간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윤의섭의 시들은 한결같이 '죽음'이라는 화두 근처에 서성인다.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새길이라고 보기에는 진부하지만, 무언가 남들이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을 끈질기게 건드렸다는 부분은 시인의 장점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시인은 그러한 죽음을 단순한 어떤 상징에서가 아니라 비틀리고 괴기스러운 모양의 시의 양태로 드러낸다. 까마귀는 죽음을 전갈하러 계곡을 날고(까마귀의 둥지 70쪽), 죽음을 가려주었던 것은 세상의 뒷모습이었으며(팩스의 꿈 104쪽) 죽은자의 영정은 하염없이 웃고 있다(오후 세시의 빈소 28쪽).
이러한 죽음의 배후는 무엇이었던가. 나는 각박하고 타락한 문명에 잔존하는 죽음이란, 시인이 이렇듯 산문적 중얼거림 혹은 산문적 산만함으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지독히 죽음을 우리가 일상에서 껌씹듯 취급하는 시인의 태도는 자못 모골이 송연할 정도이다. 요리강좌 생방송에서 여자 요리사가 권총자살후 '사람들은 입맛을 다셨다'(인육 19쪽)는 결말은 그러한 단적이 예를 제공한다.
그러나 윤의섭의 시가 전적으로 내가 평가하기에 긍정의 상태가 아님을 밝혀두고 싶다. 이제 시라는 영역에서 바라볼 때 우리말로 써먹을 대로 써먹은 시세계는 더이상 갈 곳이 없는가? 하이에나처럼 짐승의 썩은 고기를 찾아 먹듯 이제 시인은 시대의 암울과 죽음 그리고 온갖 추악한 내면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는가? 그것을 '상상력'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을 한 후 비밀결사처럼 읽는 독자들에게 주는 최고의 영양 주사이던가.
지나친 비약과 모호함 그리고 주저리주저리 넋두리 같은 진술들, 이러한 이미지는 빵공장에서 빵을 찍어내듯 시집 전반적인 죽음의 분위기를 드러내고 있다. 나는 이 시집을 접하면서 섬뜩함에서 오는 나 자신의 반성을 하게 만들었다. 안으로 안으로만 들어가면서 쓰여졌던 시들은 이제 통용의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것 같다. 나는 안도현의 말처럼 시대가 어지러울수록 시는 좀더 올바른 위치에서 따뜻하게 비춰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슨 특별한 계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그런 식의 접근을 염두해 두어야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시 한 편을 위해서 시 만 편을 써야 한다는 윤의섭, 그가 자서에서 밝힌 내용처럼 시를 대함에 있어서 진지해질 필요는 있다고 본다. 그러나 시 만 편을 쓰지 못한 우리들은 진정한 시를 쓰지 못하는 것일까? 그 진정한 시를 위해서 만 편이나 되는 삶을 뒤적이며 적는 것이 이 시대의 시쓰기일까? 섭섭하지만(?) 윤의섭은 정말 많은 습작기를 거친 흔적이 보인다. 무엇보다도 자기만의 색깔을 지닌다는 것, 그 얼마나 뚜렷한 시인 정신인가!
시멘트로 미장되어 있는 도시의 주차장에서 짤막한 쇠파이프가 누군가 꽂아 올린 숨구멍 같다(펌프질의 내력 40쪽)는 내용을 보면 도시는 참으로 갑갑하고 이기적이라는 느낌이 온다. 그러한 우리의 일상을 거울처럼 촘촘히 드러낸 윤의섭의 시세계에 박수를 쳐야 할까. 아니면 슬퍼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