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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닐하우스 밤기차 - 이승주

2011.02.21 10:22

윤성택 조회 수:1085 추천:116


《위대한 표본책》/  이승주 (1995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 《서정시학 시인선》038

          비닐하우스 밤기차

        산이 강에 들어
        강과 산이 아득히 저물면
        객실마다 불을 켜고
        사방에서 기차들이 모여든다
        오래 지켜보았지만 그 기차들이 떠나는 걸
        여태 한 번도 본 적 없다
        기차는 언제나
        우리가 잠든 사이에 기적을 울리며 떠났다
        잠 깨기 전으로 돌아왔다
        은박지처럼 깔린 달빛의 바다를 헤쳐
        푸른 기차를 끌고 기관사는
        어디로 닿아 왔는지
        어디로 돌아온 것인지
        잠에게 물을 수 없다
        깨고 나면 방울벌레들은 어디 간이역에서 내리고 없지만
        깻잎, 풋고추들에게 물을 수 없는
        우리들 꿈의 무박(無泊)의 기차
        어느새 돌아와 곤한 잠에 빠진 기차 속에서
        아침 안개를 헤치고 늙은 기관사 걸어나오고 있다
        

[감상]

산이 강에 드는 풍경이 고즈넉합니다. 강에 온전히 산이 비칠 수 있을 때는 강물이 일지 않는 바람 없는 어느 저녁이겠지요. 그 저녁은 비닐하우스 길게 이어져 있는 것도 밤기차가 됩니다. 비닐하우스 안 탑승한 풋것들, 벌레들 모두 이 세상으로 여행 온 방문객입니다. ‘기차는 언제나/ 우리가 잠든 사이에 기적을 울리며 떠났다’ 아스라한 표현처럼, 저 안의 식물들에게 우리는 어느 간이역 불빛일 뿐입니다. 평생을 논과 밭을 일구며 그 좌석에 식물들을 태워주었던 아버지, 그 늙은 기관사가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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