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고정희 (197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창비 시인선》104
사십대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
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
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감상]
시는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읽혀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느 덧 이 시가 여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문득 이곳에서도 들녘이 보입니다. 어떻게 시간이 흘러왔는지, 또 어떻게 나를 보내왔는지 잠시 십대와 이십대, 삼십대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지리산에서 불의의 사고로 타계한 시인은 이제 세상에 없지만, 인터넷에 검색되는 수많은 ‘고정희-사십대’의 시는 아직도 시인이 펜을 들었던 그 시각, 그 풍경에 가 있습니다. 지금 막 들녘에 도착한 사람, 이제 그에게도 이름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