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 신지혜 (2002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시작》시인선 2007
흘러다니는 그림자들
사람은 없고 사람 그림자들만 돌아다닌다
그림자들이 검은 자루처럼 밑으로 처진다 혹은
고무줄처럼 자유자재로 늘어나기도 하고 형체를
바꾸기도 한다 벽이나 문지방에 붙어 있기도 한다
가만히 보라.
이슥한 저녁, 주체할 수 없어 쓰러지는
벽들을 떠받치는 것들은 모두 그림자들뿐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자신의 주인들 몰래
서로 몸이 바뀌기도 한다. 그러나 주인은 모른다
혹은 주인이 잠자리 들 때 몰래 탈출하기도 한다
그림자가 출몰하는 곳에선
늘상 그림자들끼리 주인을 팔아치우기 위해서
암거래가 이루어진다 그림자들도 같은 부류끼리
끼리끼리 뭉쳐 다닌다 보았는가 거리를 떠도는
그림자들은 동작이 민첩하다
그림자들은 모의하여, 자신의 주인을 멀리
추방시키기도 한다 한때의 권력이 되었던 주인은
위기의 벼랑 앞에서 최후의 목격자인 자기 그림자 앞에
두 무릎을 뚫을 때 있다.
지금 네 옆을 돌아보라 그림자들이 침묵으로 네게 반란한다
[감상]
그림자는 동전의 양면처럼 원래의 실체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이 시는 그런 그림자에게 인격을 부여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존재 근원인 '주인'의 제거도 꿈꾸게 합니다. 이 부분이 이 시의 돋보이는 상상력의 부분이지요. '벽들을 떠받치는 것들은 모두 그림자들뿐'이라는 확신, '그림자들이 침묵으로 네게 반란한다'는 위기감 등은 스릴러적인 요소로 팽팽한 긴장을 이끕니다. 다 읽고 나면 온전한 자신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묵직한 질문이 남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