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도서관>/ 강기원 (1997년 『작가세계』로 등단) / 《현대시학》2010년 1월호
사라진 도서관
도서관이 사라졌다
익숙했던 내 의자가 없어졌다
빌려온 책들의 반납 기일이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고백컨대
책을 읽는 대신 나는
그 도서관의 책들을 한 장씩 씹어 먹었다
젖을 먹어야 할 때 그림 형제의 삽화를
초경이 시작될 무렵 데미안의 알을
머리에 피가 마르기 시작했을 때 사랑의 기술을
아무리 기다려도 피 다 마르지 않아
북회귀선의 금지된 선을, 위기의 여자를
자근자근 씹어 먹었다
그 낡은 도서관의 책들을
한 권씩 뽑아들 때마다
도서관의 갈빗대가 하나씩 뽑혀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책은 먹을수록 허기가 져 자꾸 먹어댔고
내가 뜯어 먹는 것이 피와 살덩이인줄
그땐 정말 몰랐다
개정판 사전도 베스트셀러도 없던
사라진 말들의 유적지
폐관시간도 없이 모든 게 무료였던
나의 파라다이스, 책만큼이나 많은 돌무더기
나의 찬란한 폐허, 낡은 도서관 내 어머니
내가 파먹은 그의 부장품들
아직도 입 속에서 우물거리고만 있는
이 경전들은 어쩌라고
사라진 도서관 한 채가 관 속에 누워 있다
[감상]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도서관과 같은 존재입니다. 일생의 순간순간들을 밑줄 긋듯 일깨워주며 마음을 헤아려 주니까요. 돌이켜보면 아이가 맨 처음 책을 읽을 때 그 환경은 어머니에서 비롯됩니다. 평생 책 읽는 습관을 어머니가 길러내듯, 우리의 어머니는 이미 도서관으로 살고 계신 겁니다. 언제든 펼쳐보면 내가 살아온 날들의 목록을 알 수 있으니, ‘책들을 한 장씩 씹어 먹’는 것 또한 어머니에서 읽어들인 나의 삶인 게지요. 그러나 내가 지식을 쌓아갈수록 어머니는 늙어가고,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어머니를 파먹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 어머니의 말씀들, 당부들, 그 모든 말들이 내 입 안에서 페이지를 이룹니다. 그리고 나나 당신이나 이때쯤 누군가의 도서관이 되어간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