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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 무덤 - 손창기

2010.01.27 18:01

윤성택 조회 수:1434 추천:118

  <자전거 무덤>/ 손창기 (2003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문예연구》2009년 겨울호

        자전거 무덤

        지상의 어떤 섬에는
        영원을 싣고 멈춘 자전거가 있다

        섬을 중심에 두고 공전하다가
        스스로 굴러서 가는
        뼈 같고 가죽 같고 이빨 같은 것이
        썩지 않고 뒹구는, 낯익은 족속들

        바퀴살에는 이슬이 스며들었을 것 같고
        공 차는 몇몇 아이들의 함성소리가 굴러가는 것 같고
        말라가는 다시마와 돌미역의 짠 내도 묻어 있는 것 같고
        회유하는 늙은 숭어의 비늘 하나쯤 감겨들었을 것 같고

        몸이 죽음과 맞닿아 있는 한
        늙은 숭어는 이 무덤을 지켜볼 것이다
        마지막 사정(射精)을 하고
        이 섬에 문을 열고 들어가
        한 몇백 년쯤 지낼 무덤을 물색하고 있을 것이다

        살을 발라내는 익숙한 침묵이
        움푹한 구덩이에서 페달을 밟는다
        봉분 없이

  
[감상]
섬에 자전거 한 대 버려져 있습니다. 이 시는 오래 방치되어 녹슬고 있는 ‘자전거’를 통해 찬찬히 섬을 돌아봅니다. 섬은 연안이 둥글게 테두리로 연결되어 있어 마치 자전거 바퀴와도 같습니다. 2연 ‘섬을 중심에 두고 공전’하는 것은 자전거 바퀴가 지면에 닿아 구를 때를 표현한 것인데, 이 부분이 참 와닿습니다. 섬의 연안이 자전거 바퀴라면 바퀴에 닿는 지면은 파도로 밀려오는 바다의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함성소리, 다시마와 돌미역의 짠 내, 숭어의 비늘 하나… 구체적으로 오감을 자극하는 관찰은 자전거를 통해 바라보는 새로운 발견입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이 와, 언젠가는 자전거도 점점 녹슬어 봉분 없이 섬에 묻힐 것입니다. 그러나 한때 햇볕 튕겨내며 내달렸던 순간들이 늙은 숭어 떼처럼 우리의 기억에 회유해 오기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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