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해서 머나먼》》/ 최승자 (1979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 《문학과지성》시인선 372
나는 기억하고 있다
길이 없었다
분명 길이 있었는데
뛰고 뛰던 길이 있었는데
길 끊어진 시간 속에서
어둠만이 들끓고 있었다
(셔터가 내려진 상가
보이지 않는 발자국들만 저벅거리는
불 꺼진 어둠의 상가)
그 십여 년 고요히 끝나가고 있다
아직은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길이 있었음을
뛰고 뛰던 길이 있었음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감상]
고향의 예전 살던 집이 생각납니다. 어느 때인가 유년을 보낸 그곳이 생각나서 가보았더니, 살던 집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학원 빌딩이 들어섰더군요. 길도 없고, 골목도 없어진 그곳에서 내가 살았던 하늘만 올려보다 돌아올 때 이 시, ‘나는 기억하고 있다’가 겹쳐집니다. 세상의 모든 길이 누군가의 기억에 있었던 거라면, 새길이라고 믿었던 길도 누군가의 기억을 뚫고 지나는 것일 겁니다. 길을 기억하는 이들이 늙어 사라지고 그 기억만 남아 먼지처럼 갓길에 흩어지는 그 쓸쓸함, 11년 만의 시집에 고스란히 배여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