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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사과 - 나희덕

2009.11.23 18:14

윤성택 조회 수:1066 추천:124

  《야생사과》 / 나희덕 (1989년 《중앙일보》로 등단) / 《창비시인선》301

          야생사과

        어떤 영혼들과 얘기를 나누었다
        붉은 절벽에서 스며나온 듯한 그들과
        
        목소리는 바람결 같았고
        우리는 나란히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흘러가는 구름과 풀을 뜯고 있는 말,
        모든 그림자가 유난히 길고 선명한 저녁이었다

        그들은 붉은 절벽으로 돌아가며
        곁에 선 나무에서 야생사과를 따주었다

        새가 쪼아먹은 자리마다
        개미들이 오글거리며 단물을 빨고 있었다

        나는 개미들을 훑어내고 한입 베어물었다
        달고 시고 쓰디쓴 야생사과를

        그들이 사라진 수평선,
        내 등 뒤에서 있는 내가 보였다

        바람소리를 들었을 뿐인데
        그들이 건네준 야생사과를 베어물었을 뿐인데

        
[감상]
TV 어느 프로에선가 10년을 기다려 얻은 '기적의 사과'를 보았습니다. 농약이나 비료를 주지 않고 잡초 또한 뽑지 않고 농사를 지었더니 사과에 병이 들어도 스스로 치유하고, 수확 후에도 잘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시는 이러한 야생(野生)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어떤 영혼들’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해온 자연에 대한 상징일 것입니다. 그러나 땅이 가진 본연의 힘을 외면해온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입니다. 야생사과를 ‘개미들을 훑어내고 한입 베어’ 무는 건, 인공이나 인조, 인위의 것들로부터 벗어난 자연과의 융화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내 등 뒤에서 있는’ 나는, 낯설지만 실은 나의 생성의 근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와 아버지의 유전자를 수없이 거슬러 어느 저녁, 야생사과를 따고 있는 ‘나’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 실체의 선명한 그림자가 ‘내’가 되어 드리워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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