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염전> / 김평엽 (1997년 《시대문학》, 2003년 《애지》로 등단)
붉은 염전
내게도 인생의 도면이 있었다
갱지 같은 마누라와 방구석에 누워
씨감자 심듯 꿈을 심고 간도 맞추며 살고 싶었다
바닥에 엎디어 넙치처럼 뒹굴며
아들 딸 낳고 싶었는데
돌아다보면 염전 하나 일구었을 뿐
성혼선언문 없이 산 게 문제다
선녀처럼 그녀를 믿은 게 문제다
정화수에 담긴 모든 꿈은 증발하고
외상의 눈금만 술잔에 칼집을 내고 있었다
알았다, 인생이란 차용증서 한 장이라는 것
가슴뼈 한 개 분지르며 마지막 가서야 알았다
소금보다 짠 게 계집의 입술임을
염전에서 바닥 긁는 사내들이여 아는가
슬픔까지 인출해 버린 밑바닥에서
누구의 눈물도 담보할 수 없다는 것
계집 등짝 같은 해안에 자욱이 되새 떼 내려
노랗게 우울증 도지는 현실
염전만이 소금을 만드는 게 아니다
우리 가슴을 후벼도, 아홉 번 씩 태운
소금 서 말 쯤 너끈히 나온다는 것
[감상]
어디서 눈 여겨봤던 시인데 오늘은 기어이 이 시를 다시 찾아내 읽습니다. 다 읽고 나면 가슴 한켠 만져지는 것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거칠고도 서글픈 그 무엇인데, 이것을 ‘분노’라고 해도 되겠지요. 염전을 일구는 사내의 일생에 투영되는 세상살이. 가진 것 죄다 훔쳐 달아난 여자의 배신에서 북받쳐 오르는 저 감정. 돌이켜 보건데 시의 치열함이 이러한 하나의 강렬한 심상으로 새겨지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인간의 품위고 뭐고 죄다 삼켜버릴 듯 솟구치는 분노. 이 시는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걸작이 분명합니다. 비극을 비극답게 숭고하게 하는 이런 시정신, 이것이 진정 삶의 담론이 아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