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붉은 염전 - 김평엽

2009.12.10 21:10

윤성택 조회 수:954 추천:131

  
<붉은 염전> / 김평엽 (1997년 《시대문학》, 2003년 《애지》로 등단)


          붉은 염전

        내게도 인생의 도면이 있었다
        갱지 같은 마누라와 방구석에 누워
        씨감자 심듯 꿈을 심고 간도 맞추며 살고 싶었다
        바닥에 엎디어 넙치처럼 뒹굴며
        아들 딸 낳고 싶었는데
        돌아다보면 염전 하나 일구었을 뿐
        성혼선언문 없이 산 게 문제다
        선녀처럼 그녀를 믿은 게 문제다
        정화수에 담긴 모든 꿈은 증발하고
        외상의 눈금만 술잔에 칼집을 내고 있었다
        알았다, 인생이란 차용증서 한 장이라는 것
        가슴뼈 한 개 분지르며 마지막 가서야 알았다
        소금보다 짠 게 계집의 입술임을
        염전에서 바닥 긁는 사내들이여 아는가
        슬픔까지 인출해 버린 밑바닥에서
        누구의 눈물도 담보할 수 없다는 것
        계집 등짝 같은 해안에 자욱이 되새 떼 내려
        노랗게 우울증 도지는 현실
        염전만이 소금을 만드는 게 아니다
        우리 가슴을 후벼도, 아홉 번 씩 태운
        소금 서 말 쯤 너끈히 나온다는 것
        
        
[감상]
어디서 눈 여겨봤던 시인데 오늘은 기어이 이 시를 다시 찾아내 읽습니다. 다 읽고 나면 가슴 한켠 만져지는 것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거칠고도 서글픈 그 무엇인데, 이것을 ‘분노’라고 해도 되겠지요. 염전을 일구는 사내의 일생에 투영되는 세상살이. 가진 것 죄다 훔쳐 달아난 여자의 배신에서 북받쳐 오르는 저 감정. 돌이켜 보건데 시의 치열함이 이러한 하나의 강렬한 심상으로 새겨지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인간의 품위고 뭐고 죄다 삼켜버릴 듯 솟구치는 분노. 이 시는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걸작이 분명합니다. 비극을 비극답게 숭고하게 하는 이런 시정신, 이것이 진정 삶의 담론이 아닌지요.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31 눈의 여왕 - 진은영 2010.01.13 1041 105
1130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 신해욱 2010.01.12 1282 109
1129 동사자 - 송찬호 2010.01.09 1030 118
1128 음악 - 강성은 2010.01.07 1171 133
1127 합체 - 안현미 2010.01.06 1029 146
1126 2010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2010.01.05 1349 138
1125 단단해지는 법 - 윤석정 2010.01.04 1251 132
1124 겨울의 이마 - 하정임 2009.12.18 1189 127
1123 어느 행성에 관한 기록 - 이정화 2009.12.16 929 125
1122 자폐, 고요하고 고요한 - 최을원 2009.12.15 949 129
» 붉은 염전 - 김평엽 2009.12.10 954 131
1120 못을 박다가 - 신현복 2009.12.07 1003 112
1119 연두의 시제 - 김경주 [1] 2009.12.02 1084 119
1118 고백 - 남진우 2009.11.27 1144 131
1117 오늘은 행복하다 - 김후란 2009.11.26 1282 118
1116 사랑은 매일 걷는 길가에 있다 - 구재기 2009.11.24 1304 122
1115 야생사과 - 나희덕 2009.11.23 1066 124
1114 추상 - 한석호 2009.11.21 855 119
1113 대설 - 정양 2009.11.19 905 109
1112 나무 안에 누가 있다 - 양해기 2009.11.18 905 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