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연약한 재료들」 / 이장욱 (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 《현대문학》 2008년 2월호
밤의 연약한 재료들
밤이란 일종의 중얼거림이겠지만
의심이 없는
성실한
그런 중얼거림이겠지만
밤은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지 않고
맹세를 모르고
유연하고 겸손하게 밤은
모든 것을 부정하는 중
죽은 이의 과거가 빈방에서 깊어가고
소년들은 캄캄한 글씨를 연습하느라 손가락만 자라고
늙은 개의 이빨은 밤마다
설탕처럼 녹아가는데
신축건물들이 들어서자
몇 개의 골목이 중얼중얼 완성되고
취한 남자는 검게 그을린 공기 속을 흘러가고
밤은 그의 긴 골목이 되었다가
그가 되었다가
드디어 외로운 신호처럼
보안들이 켜지자
개의 이빨은 절제를 모르고
갓 태어난 울음들이
집요하고 가득한 밤을 향해
오늘도 녹아가는 이빨을
필사적으로 세우고
[감상]
밤은 일상적인 것이지만 그 안의 ‘어둠’을 생각하노라면 두려움이 앞서곤 합니다. 그야말로 어둠은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부정의 이면에는 현실보다 조밀한 우연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늙은 개가 짖고 취객이 사라져도 어둠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밤은 들릴 듯 말듯 중얼거리며 그 너머를 상상케 할 뿐입니다. 삶은 야성 그 자체이고 '어두워질수록 거칠어지는 건 추억'밖에 없습니다. 어둠 속 한 켠에서 태어나고 죽어가는 수많은 것들에게 우리는 외롭게 ‘녹아가는 이빨을/ 필사적으로 세우고’ 두려움을 견뎌가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