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 / 심재휘 ( 1997년 『작가세계』로 등단) / 《랜덤시선 30》(2007)
인용(引用)
오래된 가을 나무 아래는 불편하다
가지 사이로 점점 넓어지는 하늘이
불편하다
이 거리에 오래 세 들어 살면서
늘 떠났다가도 다시 돌아오면서
떨어져 나간 나무껍질처럼 외로웠는데
가을 나무에 대한 고백은
더욱 어색해져서
나는 그저 풍경을 인용하여
가을 속을 지나갈 뿐인데
그런데
누구였을까 뒤돌아보면
바람도 없이 나뭇잎 하나
가만히 내 어깨를
[감상]
가진 것을 모두 내어주고 알몸으로 겨울을 나는 나무를 생각하면 왠지 쓸쓸해집니다. 더더욱 나무에게서 사람을 느낄 때는 경건해지기까지 합니다. 일생을 구도의 자세로 살아가는 나무에 비한다면 우리는 한낱 그것을 ‘인용’해 운치를 고백할 뿐이지요. 우리는 자연에 잠시 깃들어 살고 있다는 것을 잊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불편하고 어색한 것은 이렇듯 ‘나’와 나무와의 관계가 필연으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입니다. 어리숙한 우리에게도 가을은 옵니다. 그리운 것들이 그 길 위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