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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천상의 악기*표범 - 전봉건

2009.01.21 16:04

윤성택 조회 수:1201 추천:124


『사랑을 위한 되풀이』 / 전봉건 ( 1950년『문예』지로 등단) / 춘조사


        꽃*천상의 악기*표범

        눈 내린 광장을
        한 마리 표범의 발자국이 가로질렀다.
        너는 그렇게 나로부터 출발해갔다.
        만월이 된 활처럼 팽창한 욕망,
        너는 희한한 살기를 뿌리면서
        내달았다. 검은 한 點이었다.
        나의 모든 꿈의 투기(投企)인 너.
        
        그후
        나는 몇 번인가 너를 보았다.
        창이 무너져내리는 전쟁의 거리에서도
        너는 귀마저 벌어져서 웃고 있었다.
        그때마다 돌멩이가 꽃을 낳았을 것이다.
        모래밭은
        꽃밭을 낳았을 것이다.

        죽음을 역습하였을 것이다.
        눈부신 연애가
        햇살처럼 지구를 지배하는 시간을 위하여서
        너의 천상의 악기가
        불붙는 암흑 속에서
        -죽음을.

        나는 알지 못한다.
        ‘하늘에 핀 꽃’ 그러한 것이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 속에서
        피어날 것인가 어떤가. 허나 나는 알고 있다.
        아 젊은 표범처럼
        불붙는 암흑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며
        언제나 언제까지나 내닫고 있는 너를


        
[감상]
네온처럼 점멸하는 눈송이들이 상가 유리창을 희붐하게 스친다. 거리의 신호가 바뀌면 먼지와 눈이 섞이고 사람과 차가 섞인다. 때로 진눈깨비가 나직한 어둠 속으로 휘청휘청 걸어들어가 촉수 낮은 간판 아래 기대기도 한다. 누구는 휴대폰으로 통화하거나 문자를 보내고 누구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엠피쓰리로 음악을 들으며 눈을 맞는다. 2008년 12월 광장에 눈이 내린다. 1958년 12월 한 사내가 이 광장에 있었다. 나무전신주가 전선들로 언덕의 판잣집을 일으켜 세우고, 낡은 전차는 도로 한 가운데를 유유히 지나며 겨울의 궤도를 돌고 있었다. 다방과 담배연기가 담론이 되던 시절이었다. 「꽃․천상의 악기․표범」은 1958년 12월에 발표되었고, 그 이듬해 전봉건 시인의 첫 개인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춘조사)의 맨 처음 시로 수록된다. 그러니까 이 시는 50년이라는 시간을 뚫고 그 ‘검은 한 點’ 속에서 나를 비추고 있는 것이다. 감각적인 수사와 비유, 역동적인 이미지로 가득한 이 시가 시공간을 허물어버리고 지금, 표범처럼 우리에게로 내닫고 있는 것이다.

인생에 있어 기억은 강렬한 체험에 의해 질량을 가진다. 수많은 사건들이 심리적인 공간 안에서 나름의 방식대로 망각되기도 하지만, 특수한 체험들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서 다시 경험되면서 여러 가지 형태로 삶에 투사된다. 문학에 있어 그것은 직관에 의한 과거의 재건과 같다. 현대사에서 6.25전쟁은 그런 의미에서 무거운 기억의 구조물인 셈이다. 시 한 편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시대로 귀환하여 기억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누구에게든 전쟁은 욕망의 무서운 확산이다. 비정하고 살육이 자행되는 잔혹한 현실이 전쟁이고 그 기억이다. 실제로 전봉건 시인은 6.25에 직접 참전했다가 부상으로 제대한다. 이 시는 그래서 지금 ‘창이 무너져내리는 전쟁의 거리’를 지나 ‘천상’으로 가는 여정에 있다.

전쟁의 원인은 약육강식이나 지배종속의 생존본능이다. 그러한 욕망이 ‘검은 한 點’으로 응축되고 그 점들이 얼룩져 몸을 이룬다. ‘한 마리 표범’이다. 그렇게 표범은 전쟁의 욕망이면서 나로부터 출발한 본능이다. 어둡고 사악한 나의 또 다른 면면들이 ‘만월이 된 활처럼 팽창’하며 긴장하고 ‘희한한 살기’로 시간 속을 역동한다. 눈 내린 광장을 달려 나간 표범을 상상해보라. 때론 ‘표범의 발자국’이 그 실체보다 무섭고 강렬하다. 살아가면서 문득 나를 다른 곳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가 있다. 그것은 시간을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는 표범, 우리 자신의 섬뜩한 내면이다. 전쟁의 거리에서 실성한 것처럼 웃고 있는 ‘너’도 사실은 나의 내면에서 울고 있는 나의 변장이다. 그러니 모서리가 다 닳은 돌멩이에도 생명이 없겠는가.

        시를 쓰기 직전의 시인의 상태는 진공 속의 돌멩이와 같다. 돌멩이는 나뭇잎의 색깔과 냄새가 잔잔하게, 혹은 파도처럼 출렁이는 공기 속에서 비로소 눈을 뜨고 호흡한다… 돌멩이가 공기 속에서 생명을 얻어 지니듯이, 그러니까 항상 시인은 이유와 가치를 지니려는 돌멩이이다.
        - 전봉건, 「사랑을 위한 되풀이 후기」중에서, 혜진서관, 1985)

엄밀한 의미에서 공간과 시간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유방식일 뿐이다. 바위에서 떨어져 나온 돌멩이가 다시 부서지고 또 부서지고 끝내 한 줌 흙으로 변한다면 ‘돌멩이가 꽃을 낳’는 것은 예정된 운명인 것이다. 딱딱한 제 몸의 일부가 흩어지면서 모래가 되어간다 할지라도 돌멩이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형태를 달리해 의미를 지속할 뿐이다. 결국 이 시에서의 물질은 살아있는 정신 그 자체이다. ‘모래밭은 꽃밭을 낳’는 것이 실존의 방식인 것이다. 무생물이 생물을 낳는 것. 이것이 꿈이겠는가? 초현실적인 환상이겠는가? 이 공격적인 희망이야말로 ‘죽음을 역습’하는 것이다.

‘연애’는 욕망의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다. 그리고 삶의 의지를 타인과 소유하는 특별한 의식이다. 연애는 나와 네가 삶에서 죽음으로, 죽음에서 삶으로, 혹은 삶에서 삶으로 유추되고 전용케 한다. 돌이켜보면 삶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 바로 이 ‘죽음’이다. 연애의 열망이 폐허 위에 새로운 진실을 세운다. ‘불붙는 암흑’은 어두운 것들의 소각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구이다. 서른 살의 시인이 바라보는 자신의 내면은 이렇게 청춘을 발화하면서 전쟁의 고통에서 희망을 상상해낸다. 거리에는 아직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눈 내린 광장을 지나서 각자의 여정대로 흘러갈 것이다. 어쩌면 우연히 처음 마주친 당신 눈동자에서 ‘하늘에 핀 꽃’을 발견할지 모른다. 우리는 그것을 이 시에서처럼 기대나 소망 혹은 이상이라고 짐작해도 된다. 언젠가 만난 것 같은 느낌. 그 생각을 간직한 순간, 두 개의 시간이 나뉘어져 간다. 하나는 50년 전의 눈 내린 광장으로, 하나는 앞으로도 만나야 할 이 시의 독자들 눈빛 속으로 뻗어간다. 그렇게 이 시를 체험하는 대신 우리의 인생이 ‘젊은 표범’의 자취를 쫓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이내 어둡고 축축한 곳에서 길고 흰 송곳니를 드러낸 채 웅크려 있는 것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 눈빛이 행간에 번뜩여온다.  


* 『현대시학』2009년 1월호 게재

윤성택
․ 충남 보령 출생 ․ 200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 시집 『리트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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