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문신』 / 박완호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 문학의전당 시인선 62
풀잎처럼
처마 끝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들이
풀잎에 떨어질 때마다
딩 딩, 풀잎이 오르간 소리를 낸다
다른 풀잎들도 한꺼번에 몸을 젖혀가며
제 몸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나뭇가지에서 막 떨어져 나온
은행잎 하나가
원래 그곳이 제 집이었던 것처럼
가장 편안한 자세로 풀의 무릎 아래 눕는다
누가 내 정신의 건반을 두드리는 것일까
몸속에서 작은 음계 하나 떠오른다
저 풀잎들처럼 나도 어느덧
내 몸을 연주하고 있다
[감상]
시인의 감성에 젖어들면 모든 오감이 예민해집니다.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이게 되며, 들리지 않는 소리도 들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는 처마에서 풀잎으로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 소리를 ‘오르간 소리’로 감지해냅니다. 물방울의 세기에 따라 풀잎이 눕는 정도도 ‘건반’처럼 음의 강약이겠지요. 비가 온 후 하늘이 개이기 시작하는 그때. 세상 번잡한 일들을 잊고 잠시 창밖을 바라보는 마음. 아마도 그즈음에서 시인은 제 안의 음악에 귀 기울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일상의 소음으로 인해 들리지 않았을 소리들이겠지요. 그것이 그리움이어도 좋고 애잔함이어도 좋습니다. 풀잎들처럼 묵묵히 세상을 받아내는 그 자체가 生이고 음악이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