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한 손」 / 고영민 (2002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 창비시인선 297
꽃눈이 번져
잠이 오지 않을 때면
누군가 이 시간, 눈 빠알갛게
나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꾸만 나를 흔들어 깨운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눈 부비고 일어나 차분히 옷 챙겨입고
나도 잠깐, 어제의 그대에게 멀리 다니러 간다는 생각이 든다
다녀올 동안의 설렘으로 잠 못 이루고
소식을 가져올 나를 위해
돌을 괸 채
뭉툭한 내가 나를 한없이 기다려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순간, 비 쏟아지는 소리
깜박 잠이 들 때면
밤은 더 어둡고 깊어져
당신이 그제야
무른 나를 순순히 놓아줬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도 지극한 잠 속에 고여 자박자박 숨어든다는 생각이 든다
그대에게 다니러 간 내가
사뭇 간소하게 한 소식을 들고 와
눈 씻고 가만히 몸을 누이는
이 어두워
환한 밤에는
[감상]
‘생각이 든다’라는 말에 가만히 기대어보게 되는 시입니다. ‘밖에서 속이나 안으로 향해 가거나 오거나 하다’가 ‘든다’ 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생각에 드는 것은 내가 당신에게 간다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당신도 그 생각에 들어서 생각이 생각을 만나는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애잔하고 소슬한 느낌. 시에도 체온이 있다면 이 시는 서늘하면서 쓸쓸한 어느 밤의 창밖만 같습니다. ‘내가 나를 한없이 기다려준다는 생각’, 그렇게 먼 훗날 내가 나를 만나는 것이겠지요. 지금 만나러 갑니다, 라는 말이 아니어도 당신 생각이 이렇게 다녀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