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그릇 경전』 / 이덕규 (199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실천시선 180
강 건너 불빛
가까스로 도망쳐 온 듯하다
쫓기고 쫓기다 간신히 강을 건너
주저앉은 짐승처럼 잔뜩 웅크려 엎드린
앞산, 중턱 옆구리께
외딴 불빛 새어 나온다
사납게 물어뜯긴 자리,
벌겋게 농익어 번져가는 신열처럼
욱신거린다 저 덧난 상처의
중심에 깊게 박힌 심, 넓게 짚어
꾹 짜 올리면 앞산이 움찔
강물이 잠깐 멈췄다가 출렁 흘러가고
뜨거운 백 촉짜리 알전구 같은
피고름 덩어리 하나 불쑥
솟아올라올 것 같다 가끔
고개 돌려 화농처럼 희미하게
흘러내리는 불빛 핥을 것도 같은데
검은 산은 끝내 꼼짝하지 않는다
참 뻐근하게도 곪아서
씀먹씀먹, 밤마다
잠 못 이루는 통증처럼 거기, 그가 산다
[감상]
밤의 불빛을 고통의 흔적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합니다. 우리가 아는 상식처럼 외딴 불빛은 더 이상 외롭다거나 쓸쓸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자연이라는 거대한 어둠 속으로 도피해온 문명의 여린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불빛은 이처럼 상처를 덧나게 하면서 검은 산 속에서 고름을 내비치는 것입니다. 집요하게 상처를 응시하면서 응축된 이미지로 불빛의 국면에 가닿는 통증과, 그 한 가운데로 혈관처럼 흐르는 강물이 치열하게 다가옵니다. 흙빛 시집. ‘척박한 몸속에서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그 힘겨운 감탄사’가 진정 ‘꽃’의 시절에 머물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