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거기 - 조말선

2007.11.21 17:50

윤성택 조회 수:1245 추천:122

「거기」 / 조말선 (1998년 『부산일보』, 『현대시학』으로 등단) / 《현대시학》 2007년 11월호


        거기

        모두가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정성스레 커피를 만들어 마시는 사람은 미쳤다
        그런 사람이 떠난 곳은 아닐 것이다
        어두운 창밖의 나뭇잎들이 혼란스레 안면을 뒤바꾸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는 어둡고 저곳은 더 어둡다
        나뭇잎의 익숙한 앞면보다 뒷면이 더 선명해진다
        전화에다 대고 거기라고 했으니 사람이 무슨 장소도 아니고
        졸지에 장소가 된 그는 우뚝 멈춘다
        나뭇잎의 앞면과 뒷면처럼 여기와 거기는 한 몸이다
        그래서 우리는 몹시 멀다
        여기에 내가 있을 때 왜 나는 거기에 있고 싶을까
        바람이 아무리 세게 불어도
        나뭇잎의 앞면과 뒷면은 섞이지 않는다
        내가 여기 있을 때 거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은 흡족하다
        다만 여기와 거기는 섞이지 않는 것이다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아득히 시점이 달라져 있다
        커피 잔을 씻지도 않고
        영정 속에 든 사람이 간 곳은 아닐 것이다
        나는 여기 있어서 거기가 그립다


[감상]  
‘저기요!’라고 식당에서 한 번 쯤은 불러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나와 타인의 거리를 설명하는 이 말, 더 나아가 이 시의 <거기>는 장소이자 그리움의 대상이 됩니다. 나뭇잎의 앞면과 뒷면은 필시 존재하는 것이고, 여기와 거기 또한 분명 구분되는 시공간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그 거리를 계측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몸>으로 감응되기를 원합니다. 누구는 술 때문에 세상을 뜨기도 하지만, 커피 잔을 씻지도 않고 갑작스레 세상을 뜬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세상이 불공평하다거나 공평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여기 있어서 거기가 그립다>는 애잔함만이 이 시공간을 허물 뿐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51 달1 - 박경희 2002.08.08 1503 241
1050 내 마음의 풍차 - 진수미 2001.08.16 1717 241
1049 12월 - 강성은 [3] 2005.10.26 2073 240
1048 푸른 국도 - 김왕노 2005.08.04 1421 240
1047 음암에서 서쪽 - 박주택 2002.09.24 1086 240
1046 소주 - 최영철 2001.08.06 1556 240
1045 행성관측 - 천서봉 2006.09.22 1521 239
1044 엽낭게 - 장인수 2006.09.13 1272 239
1043 밤바다 - 권주열 [1] 2005.06.22 1532 239
1042 편의점·2 - 조동범 [2] 2004.03.18 1390 239
1041 정지한 낮 - 박상수 2006.04.05 1763 238
1040 전생 빚을 받다 - 정진경 2005.12.20 1671 238
1039 움직이는 별 - 박후기 [1] 2003.12.04 1597 238
1038 모니터 - 김태형 2006.06.26 1558 237
1037 나귀처럼 - 김충규 2006.07.13 1749 236
1036 어느 가난한 섹스에 대한 기억 - 김나영 2006.07.04 2417 236
1035 이발소 그림 - 최치언 2006.01.18 1632 236
1034 홈페이지 - 김희정 [2] 2005.10.07 1698 236
1033 주름들 - 박주택 [1] 2005.06.21 1379 236
1032 생크림케이크 - 조은영 2004.03.30 1519 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