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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버들 상회 - 이영옥

2008.01.16 08:58

윤성택 조회 수:1212 추천:133

『사라진 입들』 / 이영옥 (2004년 『시작』, 2005년 『동아일보』로 등단) / 《시작》 시인선


        왕버들 상회

        왕버들의 깊은 그늘에
        발을 담그고 늙어가는 구멍가게
        예전부터 주인이던 여자는 이제 노파가 되었다
        선반을 비추는 형광등의 눈은 침침해졌고
        가는귀가 먹어 버린 이 집은 웬만한 기척에는
        밖을 내다보지 않는다
        바람이 왕버들의 어깨를 주무르는 걸 보면
        가게의 실제 주인은 나무인지 모른다
        내가 어쩌다 가겟집 앞으로 지나갈 때면
        노파는 산도과자가 기다린 헝클어진 시간을
        정돈하거나 빨랫비누 위에 내려앉은 사각의 고요를 털어내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 노파는 소리 없이 움직여
        연탄가스로 매캐해진 어두컴컴한 가겟방을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푸른빛으로 물갈이를 했다
        동네 사람들은 노파가 끓여주는 라면과 신김치조각에
        몇 백 년도 더 된 그림자처럼 붙들려 있었다
        가끔 유리창에 찍힌 실루엣들은
        산소가 부족한 금붕어처럼 입을 쩍쩍 벌렸다
        왕버들의 그늘은 몇 십 년을 팔아내도 줄어들지 않았고
        그 집은 더 이상 시간 밖으로 걸어나오지 않았다
        누구든 왕버들 상회에 붙들리기 좋은 달밤
        세상을 건너갔다고 생각하는 것은 제자리에 있는 것들이다


[감상]
수명이 길기 때문에 버드나무 중 으뜸인 왕버들은 호숫가 등에서 자란다고 합니다. 여느 시골에서 보았음직한 구멍가게, 왕버들 상회가 섬세한 필치로 소묘됩니다. 세월이라는 것은 흘러간 것이 아니라 왕버들 고요로 내려앉는 <그늘>의 시간입니다. 가겟집에 진열된 사물에서부터 심지어 그곳을 드나드는 사람들까지도 그 그늘에 <붙들려> 있는 것입니다. 바깥에서 들여다보는 가게 안은 <푸른빛으로 물갈이>되는 곳이자, 불빛조차 <산소가 부족한 금붕어처럼 입을 쩍쩍> 벌리는 모양으로 유리창에 찍혀오는 공간입니다. 시간은 그렇게 왕버들 가게를 거쳐 생의 일부분들을 지녔다가 잊었다가 고요한 그늘의 중심으로 사라질 뿐, 밖으로 걸어나오지 못합니다. 이것이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시간과 삶에 대한 가역반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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