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밭 전별기』 / 유종인 (1996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 《실천문학》 (신간)
모과 1
불뚱이처럼 서서 그가 주워섬기는 말을
침묵은 허공에게 건넨다
왕년에 한주먹 했다는 사람들을 보면
주먹보다 술에 더 길들어 있다
왕년의 주먹은 이제
술병을 아니 술잔을 드는데도 쉽게 떨린다
왕년이 다시 온다면
그 당찼던 돌주먹을 잠시만 가을볕에 매달아놓고,
보기만 해도 가난한 사람들
창가에 골똘히 굄질해놓아라
상심한 당신 속내를 아무도 씹지 않으니
왕년은 갔다고 슬픈 주먹다짐은 마라
제자리서 천 년을 바위 묵어도
향기는 물러터지는 자의 순애보인 것,
그 색이 보이지 않아도 왕년은 살아 있는 것
주먹을 쥐고도
주먹을 펴 주위를 보듬는 향기여
[감상]
'왕년'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은 대체로 추억의 힘이 셉니다. 그런 사람 곁에서 이야길 듣고 있노라면 그 사람의 은은한 향기를 느낄 수 있지요. 이 시는 그런 단단한 '주먹'이 '모과'로 형상화 되는 과정이 애틋하게 이어집니다. '왕년은 갔다고 슬픈 주먹다짐은 마라'에서 알 수 있듯 시를 전개하는 화자는 이제 막 노랗게 익어가는 모과에게 마치 타이르는 것 같습니다. 울퉁불퉁하고 향기는 나지만 맛은 시고 떫은 모과에게서 '순애보'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시의 매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