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크림과 늑대』 / 이현승 (1996년 『전남일보』, 2002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 《랜덤하우스》(2007)
도망자
나는 사라지는 자
삼투되는 것들의 친구
휘발되는 모든 것들의 아버지.
뜨거운 대지의 날숨과 담배 연기가 뒤섞이듯
우리는 서로 다른 출구에서 나왔지만
같은 입구를 향해 달려갑니다.
상투적이고 반복적인 벽지 무늬처럼
우리는 언제라도 결합될 수 있어요.
그러므로 나는 어두운 저녁의 그림자
당신의 시야 뒤편으로 흐르는 자
나는 태양의 반대자로서
태양을 등지고 잎맥 속으로 스미듯이
모든 비밀의 목격자로서
나는 대지의 날숨에 담배 연기가 뒤섞이듯이.
바보는 천재의 은신처
평범함을 가장해서 우리는 안부를 나눕니다.
이로서 다시금 불만은 사라졌어요.
신문에는 물타기에 대한 의혹이.
나는 유령처럼 활보하는 자
나는 햇빛, 나는 수증기, 나는 물방울.
비로소 당신의 내부에 있습니다.
[감상]
도망치는 것은 멀리 달아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 시에서는 <삼투>되는 것이군요. 오히려 내부로 흡수되기도 하고, 날숨과 연기처럼 <뒤섞이기>도 합니다. 이는 도망자의 심리나 추격자의 심리가 서로 연결된 데에서 발견되는 통찰입니다. 도망자는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 추격자의 심리를 생각하고, 추격자는 포위망을 좁혀가기 위해 도망자의 심리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서로 속고 속이는 일련의 행위들이 정치의 <물타기>가 되기도 하고, 천재가 <바보>로 은신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 도망자란 스스로의 심리 중심에 그늘진 그 무엇일지도 모릅니다. 과감하게 사물의 묘사를 생략하고 관념의 징후들만으로 완성된 단단한 시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