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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닫다 - 문성해

2007.08.28 10:24

윤성택 조회 수:23664 추천:98

『아주 친근한 소용돌이』 / 문성해 (1998년 『매일신문』,2003년 『경향신문』으로 등단 ) / 《랜덤하우스》(2007)


        문을 닫다

        우리 집이 이곳으로 이사 와서 사는 동안 참 많은 집이 문 닫았다
        맨 먼저 맥주 맛이 이 골목에서 제일이던 쿠바*가 문 닫자
        그곳에서 새벽까지 떠들던 술꾼들이 문밖으로 다 뿔뿔이 사라졌다
        술꾼들의 지린 오줌을 받아먹고 무성하던 공터의 잡풀들도 문을 닫고
        잡풀들 사이 걸린 거미집도 문 닫았다
        오겹살 맛이 기막히던 고그리*도 어느새 문 닫았고
        그 커다란 냉동고에 누워 있던 수많은 오겹살들이 구름 위로 사라졌다
        오렌지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오렌지마트가 문 닫자
        그 많은 상상 속의 오렌지들도 다 문밖으로 사라졌다
        쌩쌩복권방이 문 닫고 신나라노래방이 문 닫고 조은약국도 문 닫았다
        문 을 닫 았 다
        라는 말 곰곰 되새겨보니
        영 끝장은 아니라는 희망의 신 침이 입 안에 고인다
        그 집의 추억은 계속 문을 열고 있기 때문인가
        식탁이 몇 개며 변기 커버의 색깔까지도 기억하는 내
        추억 속의 그 집은 오래오래 성업 중이다
        보이지 않는 문 안에서 영원히 영업을 하는 사람들
        거리에서 만난 그 얼굴들은 아직도 성업 중인 듯
        예전보다 더 하얗고 조금은 태양을 부끄러워하는 듯 보였다
        
        훗날 그 집의 기억마저 문을 닫았을 때
        무거운 눈꺼풀을 모두 내린 그 집은
        그제야 영원한 잠에 빠져들게 된다


* 쿠바와 고그리는 내가 사는 동네의 맥주집과 고기집 이름인데 얼마 전에 다 문 닫았다.

[감상]
<추억 속의 그 집은 오래오래 성업 중이다>에서 마음에 온기가 돕니다. 사라져가는 것들, 그리고 잊혀져 가는 것들에게 보내는 연민과 애정 같은 것. 하나 둘 떠나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두고 간 것은 막막함일 터인데, 그 굳게 닫힌 문을 열게 하는 힘은 이렇듯 상상력에 있습니다. 시를 술술 읽어가다 보면 어느덧 제 삶의 길을 찾아 떠나야만 했던 가게 주인들의 쓸쓸한 뒷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습니다. 추억도 나눠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만 존재합니다. 그런 추억들이 과거에서 현실을 밝게 비추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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