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비닐 가방
사내는 느릿느릿 광장을 가로지른다
발을 옮길 때마다 두 갈래로 비켜가는 행인들,
벌어진 틈은 뒤편에서 엇물린다
시계탑이 그림자를 바짝 당겨와 보도블록을 채워올 때
사내가 앙다문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길을 질질 끌고 오는 동안 슬픔 따위는
맞물려놓은 단단한 가방처럼 닫아버렸다
메슥거려 치미는 핏물을 뱉으며
사내는 형형해진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그늘의 지퍼를 열면 내장이 비워진
환한 뼈의 숲으로 가는 길이 있으리라
튀어나온 광대뼈는 오후를 반사한다
사내는 광장을 고스란히 기억하려는 듯
디지털카메라로 찡그린, 웃긴, 입 벌린, 풍경을 저장한다
이렇게 이별은 한낮의 그림파일이다
대합실로 향할 때 주머니에서 신호음이 울린다
우두커니 고개를 묻고 액정을 보다가
휴대폰을 그대로 휴지통에 놓아버린다
대합실 의자에 앉은 사내는 마지막 끝까지
지퍼를 올리고 야전잠바의 깃을 세워
의자 깊숙이 몸을 누인다 얇은 미소가
사람들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사이 희미해져간다
사내는 눈을 감는다
막차가 떠났는데도 꼼짝하지 않는다
지퍼 속으로 머리가 미끄러져간다
* 시집 《리트머스》(문학동네) 中
윤성택
1972년 충남 보령 출생
200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리트머스』, 『감(感)에 관한 사담들』, 산문집 『그사람 건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