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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상가

2004.06.03 22:31

윤성택 조회 수:2529 추천:87


        장안상가

        옥상 균열은 눕고 싶은 건물의 표정이었다
        부러진 안테나가 금의 끝점에 꽂혀 있었고
        입주민 양미간으로도 쉽게 금이 번졌다
        다시 펴지지 않는 금은 우울한 인상으로 통했다
        주파수를 잃은 TV는 캄캄한 우주를 수신했다
        밤에 떠난 사람도 많았으나 건물 우편함에
        배달된 청구서는 그 여행을 뒤따라가지 못했다
        건물은 너무 오래 서 있었으므로 저녁은
        쉽게 피곤했고 마을버스는 때때로 오지 않았다
        지하창고에서 입술을 나눈 남녀는 보풀이 붙은
        옷을 서로 벗겨주었다 농밀한 관계처럼
        여전히 건물에서는 재봉질이 계속되고 있었다
        누군가 현관 바닥에 실뭉치들을 힘껏 내던져
        실마리가 풀리지 않는 자해로 매듭되기도 했다
        야근을 마친 충혈된 눈에서도 균열의 뿌리가
        내려왔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지하창고 툭툭 불거져나온 철근들이
        가로수 잎맥처럼 녹슬기 시작했다 구청 직원은
        딱지를 붙이며 건물이 헐릴 것을 예고했다
        건물주가 풍으로 쓰러진 건 실핏줄 때문이었다
        온 신경을 다 드러내놓은 TV는 납땜된 뒤
        일층 전파사에 진열되었다 총천연색 담쟁이는
        건물 균열을 타고 자꾸만 뻗어올라갔다


* 시집 《리트머스》(문학동네) 中

 

윤성택
1972년 충남 보령 출생
200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리트머스』, 『감(感)에 관한 사담들』, 산문집 『그사람 건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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