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명/92서울신문신춘문예 당선시집/문학세계사>
꽃피는 아버지
그날, 아버지가 앉았던 풀밭 주위에는 풀뿌리들이 하얗게
녹이 슬었다
내딜수록 풀 길이 없이 조여지는 어둠 속에서 지상은
비틀거리고,
말도 통하지 않는 지하 영세 전자부품공장 안,
온 몸에서 흘러내린 땀내와 함께
납이 타는 냄새로 통풍되지 않는 공장은
더 이상 썩지 않는 쓰레기장 같았다
하루종일, 납땜 인두만 만지고 계시는 아버지는
소화가 잘 안되신다며 빈속만 자꾸 게워내셨고
가끔 머리카락이 힘없이 빠지곤 했다
식구들의 잦은 빈혈의 조각들처럼 구석에 쌓여있는
전자 부품들 위를 이빠진 선풍기가
심한 요동을 치며 어지러운 세상살이와 함께 돌아간다
끝내, 저녁이 되면
납땜 인두공 아버지 손은 오그라들고 펴지지를 않았다
가랑잎처럼 삵은 어머니의 손이 아무리 펴보려해도
아버지의 굳은 손은 더욱 펴지지 않았다
강물 쪽으로 외롭게 내린 뿌리들이
속살찢어 서러움 빚어내고 우리 식구들은
별빛이 흐려지는 것을 바라보면서
아버지의 오그라진 손을 두고 밤새 울었다
납빛 십자가, 풀밭 속에 파묻혔다
어둠이 절뚝절뚝 사라진 풀밭 속에서
무언가 물을 수 없는 말을 던져 놓으며
꽃잎들이 피어났다.
[감상]
납땜 인두공인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묘사가 진솔하게 배여 있습니다. 시대가 어렵고 삶이 어려웠던 시절, 아버지는 그렇게 세월을 견디다가 우리를 여기까지 보내왔습니다. 슬픔을 고스란히 전해 받는 이 시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이러한 울림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