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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게 묻다 - 천서봉

2001.06.11 11:44

윤성택 조회 수:1782 추천:327

천서봉/ 포엠큐 5월 우수작



        나무에게 묻다


        나는 나의 아무것도 나무와 바꿀 생각이 없으나
        그가 꿈꾸는 것들을 물어 본 적도 없다

        스님들은 일찍부터 禪房에 들었단다
        지나가던 보살에게 위치를 묻자
        낮지 않은 돌담, 속세를 막아서는데
        천천히 고개 돌려보니
        담장 위로 낯을 내민 대숲이 오히려 나를 보고 있다
        앉았던 돌무지 위를 추스리며 내가 다가가자
        대숲은 바람 지는 곳을 가리키며 이내 서걱거리고
        사백 년이 넘었다는 느티나무는 그저
        소소한 웃음만으로 제 주름 누르고 섰을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 이곳에 처음 뿌리 내렸을까
        나뭇잎만큼의 자잘한 햇살 밑으로
        세월의 갈피를 펼치고
        섬세한 잎맥들의 반흔을 짚어가면
        뒤바뀐 생의 主語들이 왈칵 쏟아져 내린다
        언젠가 내가 게워내던 순한 연둣빛
        마른 가지를 닮은 사람 하나
        정갈한 싸리비 자욱을 밟고
        한 번쯤 뒤돌아보며 스쳐가던 기억,
        하늘에 닿지 않아도 가늠할 수 있던 내 오래된 궤도의 연원
        위를 까치 한 마리, 선 긋고 달아난다

        적요한 오후, 적멸궁에 매달린 물고기가
        제법 소금기 가신 투명한 파동을 일으킨다 이제,
        나는 묻고 싶어진다 우리의 모든 길은
        어떻게 圓을 그리다 다시 그 자리에 숨쉬게 되는지
        슬쩍 돌아앉는 나무가
        둥근 햇무리, 後光 아래로 들고 있었다




[감상]
산사의 풍경이 한눈에 선하지요. 한 편의 시에 많은 정보량이 들어 있습니다. 삶, 윤회, 시간 이 모든 것들이 절제된 서정과 함께 드러나 있군요. 몇 백년 전, 느티나무 아래에서 만났던 인연이 얼마의 윤회를 거듭하여 오늘 화자의 자리에 섰을까 생각되기도 하고. 그 사람 문득, 전생이 "마른 가지를 닮은 사람 하나/ 정갈한 싸리비 자욱을 밟고/ 한 번쯤 뒤돌아보며 스쳐가던 기억"처럼 떠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낯선 길에서 낯익음이 든다면 전생과 관련된 곳이라고 철썩 같이 믿었던 시절처럼, 나는 그대와 또 언제 만난 적이 있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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