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흉터 속에는 첫 두근거림이 있다 - 정영선

2001.07.12 12:11

윤성택 조회 수:1677 추천:337

『장미라는 이름의 돌멩이를 가지고 있다』 / 정영선 / 문학동네



        흉터 속에는 첫 두근거림이 있다


  
          비 온 뒤 말갛게 씻겨진 보도에서
         한때는 껌이었던 것들이
          검은 동그라미로 띄엄띄엄 길 끝까지 이어진 것을 본다
          생애에서 수없이 맞닥뜨린, 그러나 삼킬 수 없어 뱉어버린
          첫 만남의
          첫 마음에서 단물이 빠진 추억들
          첫 설렘이 시들해져버린 것들은 저런 모습으로
          내 생의 길바닥에 봉합되어 있을지 모른다
          점점으로 남겨진 검은 동그라미 하나씩을 들추면
          가을잎 같은 사람의 미소가 여직 거기 있을까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 너무 다급해서
          차창의 풍경을 보내듯 흘려버린 상처들
          비 맞으면 저리 깨끗하게 살아난다
          씻겨지지 않은 것은 잊혀지지 않은 증거이다
          어떤 흉터 속에 잠잠한 첫 두근거림 하나에 몸 대어
          살아내느라 오래 전에 놓아버린,
          건드리기만 하면 모두 그쪽으로 물결치던
          섬모의 떨림을 회복하고 싶다
          단물의 비밀을 흘리던
          이른봄 양지 담 밑에서 돋던 연두 풀잎의 환희를
          내 온몸에서 뾰죽뾰죽 돋아나게 하고 싶다



[감상]
보도블록에 검게 들어붙은 껌에서 출발하여, 추억과 상처에 다다라 결국 풀잎으로 치환되는 흐름이 원숙하지요. 생각해보면 그 껌의 흔적은 분명 누군가의 입안에서 우물거리고 있었을 터이고, 그때 그 생각 느낌들이 마음을 필사하듯 껌에 찍혀져 뱉어졌을 것입니다. 글쎄요. 요즘 함부로 껌을 뱉지 않는 것을 보면, 분명 어떤 원인이 따로 있지는 않을까요? 그러니까 바닥에 들어붙은 껌은 분명, 푸! 하고 치명적으로 봉합된 흔적들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91 울고 있는 아이 - 배용제 2001.08.03 1539 254
90 나무는 뿌리로 다시 산다 - 이솔 2001.08.02 1391 242
89 기차는 간다 - 허수경 [2] 2001.08.01 1610 236
88 나는 시간을 만든다 - 박상순 2001.07.31 1466 255
87 낡은 의자 - 김기택 [1] 2001.07.30 1611 248
86 푸른 밤 - 나희덕 [1] 2001.07.27 1945 268
85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 - 황인숙 2001.07.23 1375 302
84 온라인 - 이복희 2001.07.20 1408 306
83 길에 관한 독서 - 이문재 2001.07.19 1613 291
82 카페 리치에서 - 곽윤석 [3] 2001.07.18 1623 304
81 빛을 파는 가게 - 김종보 2001.07.16 1758 322
» 흉터 속에는 첫 두근거림이 있다 - 정영선 2001.07.12 1677 337
79 사랑니 - 고두현 [1] 2001.07.11 1887 258
78 첫사랑 - 하재봉 2001.07.09 1931 306
77 꿈 101 - 김점용 2001.07.06 1667 279
76 중독 - 조말선 2001.07.05 1673 288
75 내 안의 골목길 - 위승희 [2] 2001.07.03 1550 269
74 사랑한다는 것 - 안도현 2001.07.02 2015 274
73 그대들의 나날들 - 마종하 2001.06.29 1579 319
72 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 - 장석주 2001.06.28 1694 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