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잔치는 끝났다』 / 최영미 / 창작과비평사
가을에는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감상]
하늘을 보니, 정말 가을이네요. 그래서 흔히 계절성 우울증이라는 "가을 탄다"는 말이 있는 걸까요? 이 시가 좋은 부분은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이 부분은 "가을"이기에 가능한 정황이 아닐런지요. 언젠가 저녁에 친구들을 만나 식사를 하는데 그 중 센치한 후배에게 괜히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곁에 앉았습니다. "최영미 식으로 반응 좀 해봐"라고 농담을 했더니, 눈만 둥그레 하더군요. 시에 여성성을 담보로 한 재밌는 허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