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강연호/ 문학동네
세상의 모든 뿌리는 젖어 있다
문득 떨어진 나뭇잎 한 장이 만드는
저 물 위의 파문, 언젠가 그대의 뒷모습처럼
파문은 잠시 마음 접혔던 물주름을 펴고 사라진다
하지만 사라지는 것은 정말 사라지는 것일까
파문의 뿌리를 둘러싼 동심원의 기억을 기억한다
그 뿌리에서 자란 나이테의 나무를 기억한다
가엾은 연초록에서 너무 지친 초록에 이르기까지
한 나무의 잎새들도 자세히 보면
제각기 색을 달리하며 존재의 경계를 이루어
필생의 힘으로 저를 흔든다
처음에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드는 줄 알았지
그게 아니라 아주 오랜 기다림으로 스스로를 흔들어
바람도 햇살도 새들도 불러모은다는 것을
흔들다가 저렇게 몸을 던지기도 한다는 것을
기억한다, 모든 움직임이 정지의 무수한 연속이거나
혹은 모든 정지가 움직임의 한순간이듯
물 위에 떠서 머뭇거리는 저 나뭇잎의 고요는
사라진 파문의 사라지지 않은 비명을 숨기고 있다
그러므로 글썽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세상의 모든 뿌리가 젖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감상]
강연호 『비단길』(세계사) 시집을 무척 좋아합니다. 이번에 새 시집이 나왔더군요. 이 시에서 놀라운 것은 나뭇잎이 물위에 떨어졌을 때 그 그려진 파문이 나무의 나이테를 기억하고 있다는 발견입니다. 어쩌면 좋은 시란 이렇듯 "그런 거다"라고 했을 때, 수긍이 가는 것이 아닐런지요. 다시 말해 "그런 거다"의 확고한 진언은 시적 직관력이고, 그 직관으로 말미암아 시적 울림으로 가는 방향이 제공되는 것은 아닌지요. 나뭇잎이 저 스스로 흔들린다는 것, 곱씹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