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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 - 박판식

2001.10.09 13:59

윤성택 조회 수:1479 추천:247

『2001년 동서문학 신인상』/ 박판식 / 동서문학



            장지                                  
    
             입벌리고 잠든 아버지
    
             힘없이 누워 있는,
             사실 이미 그곳에 계시지 않는 할머니의 무덤 앞에서
             엉뚱하게도 감자 캐던 날들을 생각한다
             쭈글쭈글한 반쪽의 감자 대신
             산비탈에 할머니를 묻고
             플라스틱 도시락 그릇이며 젓가락을 파묻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온다
             꼭꼭 밟아도 검은 연기가 땅 위로 새어나온다
    
             집에 돌아와 처음으로 먹는 저녁
             (불쌍한 내 식욕을 부디 용서하길)
             기름 먹은 누런 봉지가 뜯겨지고
             노릇노릇 익은 통닭 한 마리가 지나간 신문에 눕혀진다
             아무 말 없이 통닭껍질에 묻은 활자를 뜯어내는 어머니
             지친 아버지의 턱이 아래위로 삐뚤삐뚤 움직인다
    
             경북 능금상자 하나를 겨우 채운 옷가지들
             팔다리 모양대로 잘 접은
             가벼워진 할머니의 영혼이 한 줌 연기로 사라진다
             나는 어떤 미풍이 할머니를 데려가는지 보고 싶다
    
             잠든 아버지의 입 속에서 감자 줄기들이 올라온다
             집을 뒤덮은 어지러운 줄기들이 받침대도 없이
             자꾸만 공중으로 올라간다

[감상]
시를 읽는다는 것, 그것은 아마도 시인의 구조물을 더듬으며 그 안으로 들어가는 행위일 것입니다. 그리고 유심히 화상처럼 덴 자국에 눈을 가져가 보며 아슴아슴 느껴봅니다. 이 시는 할머니와 아버지를 통해 죽음과 삶의 알레고리를 느끼게 합니다. 특히 마지막 연 "잠든 아버지의 입 속에서 감자 줄기들이 올라온다"는 이 시의 탁월한 상상력입니다. 오랜만에 시를 읽으니 마음 속에도 비가 내리는 듯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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