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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금 - 정진규

2002.05.06 15:43

윤성택 조회 수:1160 추천:177

純金/ 정진규/ 제9회(2001년) 공초문학상 수상작·『도둑이 다녀가셨다』(세계사)



        순금(純金)



         우리집에 도둑이 들었다  손님께서 다녀가셨다고 아내는 말했다  나의 금거북
         이와 금열쇠를 가져가느라고 온통 온 집안을 들쑤셔놓은 채로 돌아갔다  아내
         는 손님이라고 했고 다녀가셨다고 말했다  놀라운  비방(秘方)이다  나도 얼른
         다른 생각이 끼여들지 못하게 잘하셨다고 말했다  조금 아까웠지만 이 손재수
         가 더는 나를 흔들지는 못했다  이를테면  순금으로 순도 백 프로로 나의 행운
         을 열 수 있는 열쇠의 힘을  내가 잃었다거나,  순금으로 순도 백 프로로 내가
         거북이처럼 장생할 수 있는 시간의 행운들을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
         다 손님께서도 그가 훔친 건  나의 행운이 아니었다고 강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큰 죄가 되기 때문이다 언제나 상징의 무게가 늘 함께 있다 몸이 깊다 나
         는 그걸  이 세상에서도 더 잘 믿게 되었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상징
         은 언제나 우리를  머뭇거리게 한다  금방 우리를 등돌리지  못하게 어깨를 잡
         는 손, 손의 무게를 나는 안다 지는 동백꽃잎에도 이 손의 무게가 있다 머뭇거
         린다 이윽고 져내릴 때는  슬픔의 무게를 제몸에 더욱 가득 채운다  슬픔이 몸
         이다  그때 가라,  누가 그에게 허락하신다 어머니도 그렇게 가셨다 내게 손님
         이 다녀가셨다 순금으로 다녀가셨다




[감상]
산문시에 있어서는 꼭 거쳐야할 시인입니다. 산문시가 가져야할 호흡과 리듬이 이 시에서도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습니다. 특히 "도둑"을 "손님이 다녀가셨다"라는 모순된 언어 속에서의 상징과, "금"과 "행운"과의 가치관을 통해 이미지의 자장을 넓히고 있습니다. 단, 여기서 손님은 산타처럼 몰래 왔다가야겠지요. 마주쳐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되는 순간, 불안 공포 분노가 차례로 담을 넘어 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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